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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건의검 16화

침묵하는 은명

by 대건

은명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단단한 사슬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조여왔다. 무거운 쇠고리가 절망을 속삭이는 듯 가볍게 흔들렸고, 폐허가 된 전장 위로 스산한 바람이 몰아쳤다. 희뿌연 하늘 아래, 피로 얼룩진 깃발이 바람에 너풀거렸다. 그럼에도 은명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무표정했다. 오히려 깊은 바다처럼 감정을 가라앉힌 눈빛으로 크라이슨을 바라볼 뿐이었다.


크라이슨은 천천히 은명에게 다가가더니,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하의 은명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참으로 가련하군요."


그는 코웃음을 치며 은명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찌하여 드래곤으로 현신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변신할 틈조차 없었던 겁니까?"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비틀렸다. 조롱 섞인 말투에는 승자의 여유가 넘쳐흘렀다. 크라이슨이 발로 쇠사슬을 툭툭 차자, 무겁게 울리는 금속음이 공허한 대지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은명은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시선 속에 감춘 생각들이 얽혀 있었다. 크라이슨의 조롱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은명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 웃기는군."


크라이슨이 예상치 못한 말에 미간을 좁혔다. 은명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 담긴 조소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어차피 내가 없으면 너희가 제국군을 이길 수 없을 텐데, 뭐가 그렇게 우습다는 거지?"


은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조롱과 냉소가 가득했다. 패배한 자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크라이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하던 그는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참, 기가 막히군요."


그는 머리를 젖히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요? 당신이 싸우길 거부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가 제국군을 압도했겠죠. 하지만 당신이 전투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 모양이 된 겁니다. 그럼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크라이슨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날카로운 눈빛이 은명을 꿰뚫었다.


"드래곤의 힘을 가지고도 움직이지 않는 존재. 그게 바로 당신 아닙니까? 자, 은명님. 이제 어쩌실 건가요? 싸울 겁니까, 아니면 이렇게 무릎 꿇은 채 끝을 맞이할 겁니까?"


크라이슨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손이 칼자루를 감싸쥐었다. 사슬에 묶인 채 침묵하는 은명을 보며, 그는 조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불었다. 금속의 차가운 울림과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맞부딪혔다.


은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라이슨... 이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의 말은 바람에 흩날리듯 나지막했고, 깊은 허무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이 전쟁조차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크라이슨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시는군요. 하지만 당신이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전쟁을 멈출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두 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스쳤다.


"이미 각지에서 우리 육왕군에 투항하겠다는 세력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기만 하면, 이 싸움은 단숨에 끝이 날 겁니다."


그의 선언은 마치 이미 승리를 거머쥔 자의 자신감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은명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 내가 전투에 나섰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그 순간, 크라이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망할...!"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거칠게 은명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쇠사슬이 짤랑이며 흔들렸고, 그의 손끝에서 분노가 타올랐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냐고!"


크라이슨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그의 숨소리는 격앙되어 있었고, 손에 힘이 들어간 채 은명을 노려보았다.


"제대로 된 이유만이라도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라고!"


눈빛이 흔들렸다. 분노와 실망,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원망하듯 은명을 노려보았지만, 정작 은명의 표정은 단단한 벽처럼 굳어 있었다.


"끌고 가라."


크라이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듯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여력이 없었다. 은명은 부하들에게 이끌려 사슬 소리를 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겨진 크라이슨은 무겁게 의자에 몸을 던졌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석연찮았다. 이 모든 상황이 이상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레이트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군. 은명과의 전투 상황을 말해 봐."


오신(五神)의 리더인 레이트론은 곧장 대답했다.


"현신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혈쇄결에 묶여 공격을 당하다 기절했습니다."


크라이슨의 눈빛이 번뜩였다. 의심이 가득한 시선이 레이트론을 향했다.


"무기력하게 당했다고?"


그는 한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평소의 은명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일부러 싸움을 포기했다는 말인가?"


레이트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일부러 맞아준 것처럼 보였죠."


크라이슨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이상해... 뭔가 분명 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은명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당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더 불안했다.


"주군, 제국에 보낼 동맹 사절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정대로 사절단을 보낸 뒤, 전쟁을 개시하면 되겠습니까?"


레이트론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듯 즉각적으로 물었다. 그의 태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크라이슨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니... 잠시 기다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 이마를 짚었다.


"은명이 없으면 제국을 이기는 게 쉽지 않은 건 사실이야."


레이트론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놓치면 우리와 협력하기로 한 세력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크라이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하지만 제국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은명이 전쟁을 포기한 이유를 알아야 해."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칫하면 우리 모두 공멸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어."


크라이슨의 손끝이 떨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현실이 그를 짓눌렀다.


책사로서 그는 언제나 전장을 예측하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조각이 빠진 채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제기랄...!"


크라이슨은 이를 악물었다. 싸울 준비가 된 군대, 협조를 약속한 세력들,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올린 전략. 모든 것이 완벽한데, 한 사람 은명의 의도가 그 모든 것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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