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이제 어떻게 해?"
비연의 목소리는 떨려 있었다. 그녀는 적의 원거리 마법이 이미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곧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들이닥칠 것을 직감했다. 손끝이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비수가 낮게 속삭였다.
"우린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야. 제국군이랑 적대 관계도 아니니까, 탐지당해도 문제될 건 없어."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마법의 흐름이 공기를 가르며 스쳐 지나갔다.
순간, 적의 마법이 비수와 비연이 있는 지역을 스캔했다. 짧은 정적 그리고 이어진 싸늘한 기운.
제국군 마법사의 시선이 번뜩이며, 손가락이 정확히 그들을 향해 가리켜졌다.
"대장님, 저쪽에서 이곳과 동일한 기운이 감지됩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부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흉폭한 전장에서 싸운 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그의 시선이 폐허가 된 전장을 훑었다. 거대한 균열과 녹아내린 땅, 그리고 곳곳에 남아 있는 마력이 이곳이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긴 드래곤과 또 다른 강자가 격돌한 곳이다." 부대장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리고 그들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건… 우리 병력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애초에 이 싸움에 개입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무모한 충돌은 부대를 몰살시킬 수도 있다.
"부장은 남아 우리의 행적을 보고하라. 나머지 절반의 병력만을 이끌고 정찰을 나선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당장 드래곤이나 신에 버금가는 존재와 맞닥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는 정찰대장이었다. 임무는 끝까지 완수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비수도 제국군이 점점 가까워지는 기운을 감지했다. 단순한 정찰이 아니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움직임은 조직적이었다. 마치 이미 목표를 정해둔 듯, 포획을 위해 다가오는 기세였다.
비수는 이를 악물었다. ‘우릴 발견한 건가…?’
긴장이 온몸을 조여왔다. 도망칠 것인가, 맞설 것인가 결정을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넌 여기 있어, 비연. 내가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혹시 전투가 벌어지면, 넌 즉시 자리를 피해."
비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날이 선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는 먼저 대화를 시도해보고, 상황이 어긋나면 전투에 임할 작정이었다.
비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의 결정을 존중했지만, 만약 일이 틀어져 위험에 빠진다면 어떻게든 오빠를 구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검집을 움켜쥐었다.
비수는 힘을 개방하지 않은 채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제국군의 부대장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눈빛에는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상대가 드래곤인지, 신에 버금가는 존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단호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천비문의 비수다. 우리 문파는 제국군과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는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당당히 밝히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맞섰다.
"천비문? 이봐, 중영사. 아까 분명 드래곤의 황금빛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지 않았나?"
부대장의 목소리가 낮지만 날카롭게 울렸다.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저 자 안에서 희미하게 감지됩니다."
중영사의 확신에 부대장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래... 결국 정체를 감추려는 수작이군."
제국군은 조용히 속삭이며 의견을 주고받았고, 이내 결심이 선 듯 움직임이 달라졌다.
부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비수를 향해 단호하게 외쳤다.
"새치혀로 우리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니놈이 바로 그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골드 드래곤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손이 무기의 손잡이를 힘주어 쥐었다.
"당장 전투를 벌인다 해도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순간, 제국군 전열이 정비되며 일제히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아니 이게 무슨"
비수는 당황스러웠지만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느낀이상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수가 많긴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찰 부대라면 후속 부대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문제군."
비수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물러날 것인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손을 꽉 쥐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싸울 의지를 굳힌 듯 보였다.
"무의미한 살생을 할 생각은 없다. 그만둬라!"
비수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지만, 부대장은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네놈에게 당한 동료들의 원한을,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갚아주겠다!"
부대장의 눈은 이미 광기에 가까운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그에게 이성적인 대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비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순간, 그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강렬한 마력이 일대를 휘감으며 공기가 무겁게 요동쳤다.
부대장은 비수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외쳤다.
"눈앞의 원수를 제거하라!"
제국군 병사들은 일제히 비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아직 힘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대화를 들을 마음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아..."
짧은 한숨과 함께, 그의 주변에서 황금빛 기운이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병사들의 검과 창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뻗어들었지만, 비수의 움직임은 한결같이 유연했다.
빠르게 몸을 틀며 공격을 피하고, 필요한 순간 최소한의 힘으로 적들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한 병사가 앞으로 뛰어들었지만, 비수는 가볍게 그의 공격을 받아넘기고, 힘의 방향을 바꿔 병사를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또 다른 병사가 창을 찔러오자, 비수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창 끝을 슬쩍 밀어 방향을 흐트러뜨렸다.
제국군은 계속해서 밀어붙였지만, 비수는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싸움을 이어갔다.
공격이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았고, 한 명씩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굳이 강하게 맞서지 않았다.
상대를 해치우기보다, 그들의 힘을 흘려보내며 적절한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싸웠다.
부대장은 이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포위망을 좁혀라! 절대 놓치지 마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은 점점 힘이 빠져갔다.
비수는 그들을 제압하면서도, 굳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하게 빛나자, 병사들은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장의 흐름이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