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햇빛조차 무의미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계곡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고, 죽음과 파괴의 흔적만이 황량하게 펼쳐져 있었다.
비수와 비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대체 뭐야."
비연이 충격에 휩싸인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계곡을 훑었다.
이곳은 단순한 전장이 아니었다.
이곳은 신과 용이 충돌한 자리였다.
불길에 그을려 새까맣게 변한 대지, 거대한 충격으로 갈라진 땅, 그리고 조각난 암석들이 마치 부서진 유물처럼 흩어져 있었다. 일부는 녹아내려 흐물거리는 용암처럼 형체를 잃었고, 다른 일부는 엄청난 충격에 먼지처럼 바스러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희미한 타는 냄새가 남아 있었다.
비연은 조심스레 한 발 내디뎠다. 발밑에서 사각, 하고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내려다보자, 흙과 재 속에서 거대한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패여 있었다. 마치 불길을 뿜어내던 거대한 짐승이 마지막 몸부림을 친 흔적처럼 깊고 또렷했다.
비수는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건……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비연은 그의 옆얼굴을 힐끗 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봐도 알겠어. 이 정도 흔적이라면…… 대체 뭘 상대하면 이런 전장이 나오는 거야?"
그녀의 시선이 갈라진 대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붉게 타버린 잿더미가 널려 있었고, 강렬한 열기에 바위들이 단단하게 녹아붙어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눈길이 한곳에서 멈췄다.
"……비수 오빠. 저기 좀 봐."
비수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치 엄청난 힘이 지면을 쓸어버린 듯, 넓게 패인 구덩이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부는 마치 용암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균열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비수는 천천히 걸어가 그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무언가가 쓰러졌다."
그의 말에 비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은명이 여기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비수의 시선이 흔들렸다.
은명. 그 작은 소년.
하지만 지금, 그 소년이 이 전장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수는 다시 한 번 계곡을 둘러보았다.
갈라진 대지, 부서진 바위, 불길이 남긴 잔해들.
"여기서 싸운 것은…… 인간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담겨 있었다.
비연은 그를 빤히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럼, 여기서 싸운 건……?"
비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 전장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여기서 싸운 것은, 용(龍)과 신(神).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용이 패배했다.
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 어린애가 이곳을 지나갔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비연은 무심결에 옷깃을 여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태양 아래 피부에는 땀방울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더위보다 더 깊은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은명은 깊이 패인 균열과 검게 그을린 대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부서지고 녹아내린 바위, 거대한 힘에 의해 할퀴어진 듯한 땅.
공기 중에는 여전히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발밑의 재는 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흩날렸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느린 걸음으로 시선을 돌리자, 약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은명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그들은 단순한 여행자나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었다.
갑옷을 두른 병사들과 몇몇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이 전장의 흔적을 신중히 조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땅을 살펴보고 있었고, 또 다른 이는 바위에 손을 얹고 마력을 탐지하는 듯했다.
'전투의 흔적을 조사하고 있는 건가?'
은명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목적이 단순한 관찰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는 더욱 몸을 낮추고 상황을 주시했다.
"IM" 이니셜이 새겨진 갑옷과 망토.
비연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멈췄다.
"……저건… 제국군이잖아?"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군과 육왕군은 현재 적대 관계에 있었다.
비수와 비연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국 출신이었기에 본래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상대가 부대 단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눈에 띄어 추궁이라도 당한다면,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비수는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제국군 무리 속에서 한 인물이 바닥에 손을 짚었다.
두꺼운 로브를 걸친 마법사의 손끝에서 희미한 마력이 일렁이더니, 곧 마법진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원거리 탐지 마법이다."
비수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곧 이쪽의 위치가 드러나게 될 거야."
비연이 숨을 들이켰다.
마법진의 빛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