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는 검붉게 물든 대지 위에 조용히 서 있었다. 해가 기울고, 먼지와 전장의 기운이 뒤섞인 공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제국군 병사들이 무너진 채 흩어져 있었고, 오직 한 사람 부대장만이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짙은 호흡을 토해내며 검을 손에 든 채, 그는 마지막까지 비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투는 이미 끝이 났다. 비수의 발 밑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흔적은 칼날이 지나간 자국이었고, 그의 뒷걸음마다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놀라운 건, 그 많은 이들 중 누구 하나 숨을 거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부대장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뺨을 타고 남은 상흔을 느끼며,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 검을 더욱 단단히 쥐고 있었다.
“우리 제국군이 그렇게 쉽게 무릎 꿇을 것 같나…?”
그는 무너진 부하들을 둘러보았지만, 눈빛에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전우들의 쓰러진 모습은 분명히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걸 버티고 일어서는 것이 제국군의 긍지였다. 마치 어떤 결심을 하듯, 그는 허리춤 안쪽으로 조심스레 손을 가져갔다. 그 안에 감춰둔 작은 장치가 손끝에 느껴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것은 마지막 수단이었다.
만약 지금, 이 사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온다면, 이 몸을 희생해서라도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각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고, 장치 위에 손이 완전히 닿기 직전, 그 순간이었다.
"그만둬!"
공기를 가르며 울린 목소리가 전장을 덮었다. 날카롭고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함께 어딘가 슬픈 기색도 섞여 있었다. 부대장의 손이 멈췄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그의 몸 전체가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비수를 바라본 순간, 이상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비수는 한 발 다가서 있었다. 검은 망토가 바람에 스치며 펄럭였고, 붉은 눈동자가 부대장을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싸우려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지켜보는 자, 혹은… 멈추려는 자의 것이었다.
"난 너희를 죽일 생각이 없어."
그 말은 평온하게 들렸지만, 그것이 전한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부대장은 본능적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말 한마디가 그의 판단을 멈춰세웠다.
"봐라."
비수의 손끝이 넓은 전장을 가리켰다. 부대장은 시선을 옮겼다. 쓰러진 부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럽게 펼쳐진 전열, 고통에 신음하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자들. 그러나 숨이 붙어 있었다.
부대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몇 번이나 눈을 비벼가며 주위를 살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전투에서, 저자를 상대한 병사들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럴 리가 없어… 분명히…"
그는 중얼이며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자신이 싸운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이제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붉은 눈, 날렵한 움직임, 압도적인 전투력. 인간일 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비수의 기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자의 힘.
"넌… 드래곤이지."
그는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한번 검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시선은 비수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왜 정체를 숨기지? 우릴 안심시킨 뒤, 기습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게 네 속셈이라면, 지금 말해라."
거의 외침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그 바람에 흩날린 먼지가 대지 위로 느리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내 힘의 근원이 네가 말한 대로일 수도 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망설임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내 안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난 아직 그걸 찾아가는 중이다." 그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움직임은 위협이 아닌 평화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중립국 천비문의 무인으로서 여기 있다. 그리고 불필요한 전투는 원치 않는다."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전장을 가라앉혔다. 비수의 눈빛엔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고요였다.
"너도 너희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라. 더 싸울 이유는 없다."
그 말은 명령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부대장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너진 병력, 불확실한 보고, 상부의 질책. 머릿속을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이 사내를 이렇게 보냈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그때, 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네 고민을 해결해 주지."
그 말과 동시에, 비수의 손끝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부대장은 그것을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충격이 가슴께를 타고 퍼졌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의식이 흐려지며 마지막으로 본 건, 검은 실루엣이 고요히 등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비수는 쓰러진 부대장을 바라보다가,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비연이 서 있었다. 전투에 개입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동료였다.
"비연, 떠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대지를 가로지르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발걸음 뒤로, 아직도 낯선 침묵이 전장을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