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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칭맘 그레이스 Mar 29. 2023

인생의 GPS를 내버리기로 한 길치

내 멋에 취해 심장이 이끄는 대로

길치다. 방향 감각이 없어 쉽게 길을 잃거나 길 찾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 이웃 동네로 이사 갔을 때 아파트 군락에서 이사한 단지를 찾는 것조차 버거웠다. 다급해지면 한창 업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해 "여기 8단지가 보이는데 우리 아파트는 어디야?" 이렇게 묻곤 했으니까...

대학시절 점심을 먹기 위해 교문을 나설 때마다 내가 번번이 목적지와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트는 걸 보면서 친구들은 깔깔대며 재밌어했다. 20대 후반, 절친과 한 달간 떠난 유럽배낭여행에서 잠시잠깐이라도 혼자가 되면 길을 잃을까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  지하도나 아케이드에서 헤매는 것은 기본이고, 난 지금도 절대 혼자 산에 가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GPS는 그야말로 나의 구세주, 충직한 길잡이다.

이미 숙지한, 익숙한 길을 갈 때조차 난 주행 시 내비게이션을 응시한다. 아는 길도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없으면 헤매기 일쑤고 길을 잃기라도 하면 금세 정신이 혼미해지니 어쩔 수 없다. 운전이 즐거울 리 없고 항간에 유행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은 그야말로 나에겐 남의 나라 먼~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지 도로에서만 일까? 생각해 보니 혼돈으로 가득한 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내내 난 끊임없이 길잡이가 되어줄 무엇 혹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길을 잃을까 걱정이 많았던 만큼이나 인생에서 길을 잃을까, 내 노력과 수고가 아무런 성과 없이 증발해 버리면 어쩌나, 중요한 시기에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면 어쩌지? 늘 불안해했으니까. 동시에 애써 찾은 인생 길잡이와 지침서들이 과연 믿을만한가 늘 의심스럽기도 했다. 참으로 피곤한 인간이다 ㅋㅋ. 그러나 그들과 난 화성과 금성이 먼 만큼이나 다른 인격이지 않은가? 게다가 시공간을 달리 살고 있는데 나에게 그들의 가르침이 과연 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는 마땅한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길을 찾을 때 큰 건물이나 특색 있는 장소가 표식이 되는 것처럼, 내가 선별한 인생의 길잡이와 지침서들이 성장을 돕고 중요한 터닝 포인트 역할을 해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에서의 이정표들은 선택과 결정의 실마리가 되어줬을 뿐 결국 난제를 풀며 삶을 이어간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명쾌한 길 안내를 해주는 인생의 GPS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이 또한 처음 살아보는 삶이기에 매일매일은 혼돈의 연속이다. 쇠약해지는 몸은 낯설기만 하고 정신줄을 단단히 부여잡아 보지만 흐릿해지는 단기기억 속을 자주 헤맨다. 혀 끝에서 잠시 머물다 이내 가출해 버리는 단어(명사)들은 허공을 떠돌고, 분명 웃고 있는 사진 속에 친숙한 나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친정 엄마의 모습만 점점 또렷해진다. 게다가 갱년기 증상인지 쉽게 오해하고 빠르게 단정 짓고...  넉넉했던 마음엔 어느새 정체불명의 섭섭함과 노여움이 제멋대로 드나들고 쓰임새 없이 버려지는 시간더미에 치이며 쏜살같은 세월 앞에 망연자실할 때가 많다.

오랜 기다림의 끝, 자녀양육의 과제를 마치고 인생 2막이 열렸을 땐 미치도록 좋았다. 스스로가 대견했고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지난 1년, 가족과 지인들의 축복과 응원 속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고는 있지만 어떤 것 하나 쉽지 않아 고전 중...  이 과정에서 깨닫게 된 사실은, 쉰이 넘은 나이에 도전과 모험에 발을 담그자니 심신에 각인된 오래된 경험들이 훼방을 하고, 인생철학은 세월의 결만큼이나 단단한 편견으로 굳어져 결정적 순간에 판단을 흐리게 하고, 몸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다소 비극적인가?


바라던 일들이 계획한 대로 잘 풀리지 않아 힘을 잃은 것도 사실이지만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듯 인생에 정해진 단 하나의 길만 있는 것도 아니니 무조건 힘을 내기로 한다. 어느새 인생의 지도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이르렀으니 불평과 한탄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혼돈과 무지 속에서 길을 찾다 상처 입고 원하지 않은 길로 잠시 접어들었다고 해서 그 시간과 경험이 무용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니더라. 실패를 통해 새로운 인식으로 안내되고,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나 자신에 대한 발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을 때, 소중한 뭔가를 잃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되지 않던가. 세상에 잘못된 길이 없는 것처럼 인생에 버릴 것은 없다. 완벽한 인생이 없듯,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할 정해진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완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를 속이는 허상일 뿐이니까.


도로나 길 위에서 GPS를 맹종하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의 나머지 삶만큼은 더 이상 인생내비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내 멋에 취해 심장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다수가 좇는, 대중이 소망하는 보편적인 목표나 길이 암묵적으로나마 제시되어 있는 것 같긴 한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들이 내 관심을 끌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라는 사람이 남들이 좋아라 하는 것들에 대해 일단 회의적이고 보는지라...   

남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매일의 삶은 '날것의 내 것들'로 충만할 것 같다. 안락에 취한 현대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르는 다소 뻔한 길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순간을 흔들어 깨우는 발견흥분과 자극의 원천, 낯선 것들로 남은 인생지도의 여백을 채워나가 보려 한다.  '안락과 향락'으로 수렴되는 인생의 뻔한 목적지와 여기에 이르는 일반화된 루트를 깔끔히 무시하고 꼴리는 대로 산다 한들 내가 인생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결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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