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아이에게 어떤 놀이를 시키면 좋을까요?"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하죠?”
이렇게 묻는 분은 없었다. 주로 내가 받는 질문은 학습, 진학, 진로에 관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놀이의 쓸모는 대단하고 놀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신체/정서/인지/두뇌 발달을 물론, 사고력/창의력/ 문제해결력 키우기, 욕구 충족, 스트레스 해소, 소통과 관계 맺기에 이르기까지 교육적 효과와 유익은 무궁무진하다.
놀이는 아이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학습이며, 놀이에는 좋은 육아로 열리는 셀 수없이 많은 길이 있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거부감 없이 쉽고 빠르게 배운다. 단지 놀았을 뿐인데 그 사이 공부머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경험적으로 봤을 때 스스로 잘 놀 줄 아는 아이가 학습능력도 뛰어나고 매사에 자기 주도적이며 열의도 넘친다.
놀이는 아이가 세계를 탐험하는 가장 무리 없고 순조로운 방식으로, 조기교육보다 반드시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노는 아이가 행복하다.
모쪼록 “내 아이는 잘 놀고 있을까?” 고민하는 부모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놀이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놀이는 아이가 관심과 흥미를 보이는 바로 그 사물, 장소, 현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놀이가 의미 있는 경험과 (필요하다면) 의미 있는 학습이 되도록
놀이를 자극/확장시키는 역할, 이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며 코칭이다.
case 1. 휴지 놀이 삼매경
이날 아이는 휴지를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 장난감에도 감아보고 내 팔에도 감아보면서 휴지가 얼마나 긴지, 감기고 풀리면서 두께가 어떻게 변하는지,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지를 경험했다.
휴지 더미 위에 장난감 자동차를 굴려보며 맨바닥에서 굴릴 때와의 차이를 알게 됐고 휴지 위에 누워 냄새 맡고 헤엄치며 꽤 오랫동안 놀았다.
아이가 휴지를 충분히 탐색하며 놀이를 즐기는 동안 어떠한 개입도 없이 지켜보다가 아이가 놀이를 마칠 때 즈음 한 겹의 휴지와 여러 겹의 휴지 각각을 찢어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아이는 그 차이를 느껴본다. 아이를 반듯하게 눕히고 휴지로 키를 재 주었다. 몇 칸인지 세 보고 그 수만큼의 블록 쌓기를 했다. 이 날 이후 측정 놀이는 며칠간 계속됐고, 휴지가 아닌 다른 도구를 활용한 측정 놀이가 뒤이어 한동안 지속되었다.
어릴수록 놀이의 효과는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영유아기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놀이와 손과 발, 몸을 많이 쓰는 놀이 즉 소근육과 대근육을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는 놀이가 좋다. 손발을 쓰는 놀이가 손발만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착각. 아이는 손발을 사용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 즉 끊임없이 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 모래, 웅덩이
아이에게 가장 훌륭한 놀이 환경은 바로 자연, 자연은 그 자체로 배움과 영감의 원천이며 길잡이다.
그 자연물 중에서도 내가 적극 추천하는 놀잇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 모래, 웅덩이다.
이 세 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실패 경험 없이 다양한 시도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부모들이 선호하는 레고, 종이접기, 퍼즐 같은 놀이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확실해서, 아이는 결과물에 따라 성공 혹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문제는 아이에 따라 실패 경험에 쉽게 좌절하며 그 놀이 자체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
이러한 경험이 누적되다 보면 성취도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집착하는 아이가 되기 쉽다. 심지어 기대하는 성취도를 보이지 못하게 될 경우, 성취도가 낮은 과목에 대한 학습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물, 모래, 웅덩이에서 맘껏 탐색하며 놀 수 있게 해 보라. 옷이 젖고 더러워지는 것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물, 모래, 웅덩이는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아이에게 성취감을 주는 최고의 놀잇감이 될 것이다.
case 2. 첨벙첨벙의 그날
유치원 입학식이 있던 날, 설렘 가득으로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어디쯤 갔을까, 갑자기 나타난 물웅덩이를 보자 말릴 틈도 없이 전력질주 끝에 풍덩….
댄디룩의 말쑥했던 아이가 흙탕물을 뒤집어쓴 얼룩무늬 소년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날 우리 모자는 아무 일 없는 듯 입학식을 무사히 잘 마쳤다.
그날 이후로 비가 오는 날이면 난 아이와 함께 물웅덩이를 찾아 나서곤 했다.
어느덧 스물셋이 된 아들, ‘첨벙첨벙의 그날’은 기억 못 할지 모르나 그날의 행복했던 잔상만큼은 기억 저장소 어디쯤에 잘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놀이는 충분히 지칠 때까지
이렇게 좋은 놀이를 얼마큼 시켜야 할까?
놀이는 충분히 지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충분한 탐색을 위한 기다림은 필수다. 아이가 학원 스케줄에 매여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오래 잘 놀 줄 아는 아이가 학습뿐만 아니라 매사에 집중력과 지구력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육아 경험과 오랜 상담경험으로 본의 아니게 많은 아이들을 관찰하다 보니
이제 아이가 놀이하는 모습을 보면 그 아이의 학습태도와 스타일뿐만 아니라 향후 학업성취도까지 예측이 된다. 여러 면에서 놀이하는 인간은 4차 산업혁명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의 조건으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case 3. 기다림의 육아
우리는 놀이공원보다 동물원을 더 자주 다녔다.
동물원에 가면 큰 아이는 유독 유인원에 관심을 보이며 빠져들곤 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다양한 동물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과 한 곳에 죽치고 있어야 하는 지루함을 꾹꾹 누른 채, 아이의 관심이 다른 동물로 옮겨갈 때까지 기다리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좋은 육아는 아이에게 무엇을 사주고, 아이를 어디에 보내고,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는 게 아니라
아이를 방해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차고 넘치는 놀이 경험을 주자
내가 6학년이었을 때 매일학습지를 했던 경험이 있다. 잠깐 이었지만 싫었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학습지 시장, 꼭 필요하다면 시기적절하게 잘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가 어릴수록 학습지 교육보다는 놀이식 교육을 추천한다. 놀이는 아이의 자발성, 적극성, 집중도를 끌어올릴 수 있고 '추상적 개념'을 보다 '구체적인 경험'으로 학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놀이는 부모의 욕심이 주입되는 시간이 아니다. 부모와 아이의 경험이 공유되는 시간이다. 아이와 놀아줄 때 부모의 의욕이 앞서 나가는 것을 경계하자. 놀이는 아이 중심의, 아이가 주도하는 놀이가 되어야 즐겁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운다. 세상살이와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가치와 기본적인 기술들 모두를 놀이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이제, 아이 손에 핸드폰이나 학습지를 들려주는 대신 아이와 한바탕 신나게 놀아줄 준비가 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