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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10. 2024

딸이 살았던 필라델피아

2024년 7월 31일 수요일

아침 식사로 야채, 잡곡밥, 불고기를 먹었다. 요리를 하지 않아도 간편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거다. 미국 마트에 웬만한 한국 음식은 거의 다 있었다. 미국에 와서 엄마인 나는 공주처럼 지낸다. 아침도 딸이 다 준비해 주었다. 딸은 모든 걸 챙기면서도 내가 불편할까 봐 신경 쓴다.

어젯밤에 짐정리를 하다가 남은 짐들이 널려 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남은 옷, 물건들을 정리했다. 캐리어에 담지 못한 물건들이 많다. 딸은 물건들을 살핀 후, 교회 언니에게 줄 것과 버릴 것으로 구분하여 빼놓았다. 짐을 덜어 냈다. 우리는 짐 정리하다가 피곤해서 1시간 정도 잤다. 다시 일어나니 오전 10시다. 언니네 갖다 줄 짐을 챙겨서 집을 나왔다. 택시를 타고 언니가 사는 주택 창고에 짐을 넣어 놓았다. 우리나라는 고층 아파트나 연립주택이 많은데, 미국은 단독 주택이 많다. 2층으로 된 주택인데, 언니는 그곳에서 월세로 산다. 주택 주변은 나무와 꽃들이 무성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한적하다. 너무 더워서 그런가?

딸도 6월까지 이 주변에서 살았다. 딸이 늘 위험한 곳이라고 말해서 걱정했었는데, 직접 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위로가 됐다. 딸이 자주 가던 공원에 갔다. 살던 집에서 공원까지 자주 산책했다는 길이다. 커다란 공원도 있다. 공원은 나무와 잔디로 되어 있었다. 공원 중앙은 커다란 호수처럼 움푹 패어 있다. 그곳에서 한 가족이 연날리기를 하고 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도, 돗자리를 깔고, 다리 펴고 앉아 대화를 하는 가족도 있다. 한가롭게 자연을 누리는 사람들. 미국에서 와서 자주 보는 모습이다. 아마도 딸이 그런 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녀서 그럴 것이다.

이 공원을 지나 숲으로 더 들어가니 묘지공원이 나온다. 묘비가 많이 보이지만, 넓은 잔디공원이라 무서운 느낌이 없다. 딸은 이곳으로 조깅을 하러 자주 왔다며, 이 공원이 정말 좋다고, 엄마도 좋지 않냐며 신이 나서 말한다.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공원 안으로 계속 걸어가니 풀향기가 진하게 났다. 향긋한 꽃향기 냄새를 맡느라 코를 실룩실룩했다. 딸이 좋아할 만한 곳이다. 딸이 살던 집에서 이 공원까지 걸어서 1시간이 걸린단다. 딸은 이른 아침에 조깅으로 이 길을 왕복했다. 딸이 다녔던 곳을 보여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아픈 허리 통증이 가볍다. 걸을 때는 통증이 좀 덜하다가도,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려면 엉거주춤했다. 조금씩 좋아지기를 바라며 살살 움직였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바람이다.

11시 30분, 수요일 오전 예배를 드리러 갔다. 딸이 다닌 교회에 갔다. 교회가 컸다. 예전에 병원으로 사용되던 던 건물이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어르신들만 보인다. 젊은이는 없다. 예배가 끝난 후 딸은 청년부 목사님을 소개해 주었다. 목사님은 딸을 칭찬했다. 이곳에 와서 힘든 마음을 교회에 와서 달랜 딸이다. 새벽예배와 금요 저녁예배, 주일예배, 셀모임. 딸의 외로움과 아픔을 함께 해 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딸은 미국에 있으면서 통화할 때, 이곳 교회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교회에서 속상했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감사했던 일, 고마운 일. 아는 사람 아무도 없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년 동안 딸의 삶을 지탱해 준 곳이다. 그 교회를 딸은 나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다음에 간 곳은 교회 근처 카페다. 딸이 교회 청년들과 자주 들른 곳이다. 샌드위치와 음료를 먹었다. 샌드위치가 엄청 크다. 미국 음식은 너무 짜다. 그래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배부르도록 먹었는데도 남았다. 남은 샌드위치를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 딸은 내가 다 먹을 수 있다고 곁에서 응원했다. 먹어도 먹어도 남아서 포장했다. 딸은, 남은 음식을 내가 나중에 꼭먹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사랑이 가득 담긴 딸의 투정섞인 으름장이다.

샌드위치가 점심식사다. 걸었다. 딸이 다니던 대학교에 갔다. 학교 가로수 길이 아름다웠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이곳을 공원 산책하듯이 걸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이 신기할 뿐이다. 딸이 학교 건물에 들어가 무언가를 처리하는 동안 나는 건물 2층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잠시 쉬었다. 유리창 밖, 울창한 가로수가 보인다.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딸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니, 놀랍다. 엄마인 내가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거의 1년 동안 안간힘 쓰며 유학 준비를 했다. 엄마인 내 앞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힘들다고,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길이 안 보인다고 울었다. 친척이나 지인들 중에 미국 유학과 관련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딸 혼자 해냈다. 내가 해 준 것은 곁에서 믿어 주고 기도해 준 게 전부다.

우리는 학교를 나와 버스를 타고 '자유의 종'이 있는 곳으로 갔다. 펜실베이니아 독립기념관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이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자유의 상징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도 보았다. 참전비 사이에 지도가 있었다. 동해가 일본해로 새겨져 있었다. 아무도 고칠 수 없는 걸까?

딸과 나는 마트에 갔다. 며칠 동안 미국에 있는 마트를 몇 군데 다녔다.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는 곳이라던지, 가격이 비싼 상품을 파는 마트에는 백인들이 많이 보였다. 싼 가격에 파는 물건이 진열된 마트에 가면 흑인이 많았다. 도로변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대부분은 흑인이다. 택배 물건을 나르거나 짐을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흑인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마트에서 남은 짐을 넣을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더 구입했다. 방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정리해 놓은 짐을 넣었다. 이불, 베개만 내일 아침에 넣으면 된다. 나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보여주느라 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딸은 내 앞에서 밝다. 씩씩하다. 아직 기쁜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데도. 나는 그런 딸이 사랑스럽고 한없이 고맙다. 내 아들과 딸은 나에게 돈을 주거나, 잘 나가는 직장에 취직하지도 않았다. 멋진 결혼도 아직 안 했다. 부족한 상황에서, 밀려드는 불안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이겨내며, 당당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가장 자랑스럽고 고마울 뿐이다.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가! 호화로운 미국여행 코스가 아니다. 딸이 머물렀던 곳을 여행했을 뿐이다. 걷고, 달리고, 버스 타고. 싱글싱글 생글생글 웃으며, 아픈 허리 통증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행복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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