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선생님을 좋아한 여고생

이방인 같았던 고등학교 생활

by 이도연 꽃노을



익숙할만하면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지는
삶에 무조건 적응해야 하는 아이




" 자.. 오늘은 한국에 돌아와서 학교 생활을 이야기해볼까요? 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을 한 건 가요?"


"네. 고1로 입학을 했습니다."


" 고등학교 적응은 외국에 사는 것보다 어땠나요? "


" 지방 학교에 외국에서 살다 왔다니까 관심도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오해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조금은 특별한 아이


96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등교했다. 분명히 첫날이니 자기소개를 하라고 할게 뻔했다. 며칠을 생각해도 내가 누군지 어떻게 소개할지 떠오는 게 없었다. 단지 외국에서 살다가 지금 한국으로 귀국했으니 잘 부탁한다는 말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1학년 4반에 배정이 되었고 앞문을 열고 담임 선생님을 따라 들어가니 아이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핀란드에서 왔다고 해서 금발의 외국인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실망한 눈치였다. 간단히 소개를 하고 맨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낯선 풍경 속에 나


교복치마 속에 체육복을 덧입은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공부를 했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시간이 아닌 다른 과목시간에는 아이들이 대놓고 엎드려 자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는 풍경에 난 조금 놀랐다. 특히 교련이나 국사 시간이면 아이들이 하나 둘 엎어져 잤다. 그런 수업을 할 때면 어느새 엎어져 자는 아이들 틈에서 꼿꼿이 앉아 있는 내게 선생님의 시선들이 고정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고1 일부까지 외국에서 생활했기에 중학교 교과 과정이 통째로 쌓지 못한 지식 때문에 학교 수업을 쫓아가는 것은 또 한 번 나에게는 도전이었다. 또다시 냉혹한 현실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나 속도 모르는 아이들은 잘 만난 엄마 아빠덕에 재외국인 특별 전형으로 대학교 시험을 본다고 질투도 하고 비꼬는 애들도 많았다.



야간 자율이 끝나고 10시 반쯤 집에 도착해도 우리 집은 늘 불이 꺼져 있었다. 학교 잘 다녀왔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니? 힘들진 않니? 하는 따스한 말들이 반기는 집은 티브이에서나 나올법한 일이었다. 재빨리 교복 블라우스를 벗어서 난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서 손빨래를 시작했다. 세탁기가 있었지만 블라우스 하나만 돌리기 어정쩡했다. 블라우스를 다 빨로 씻고 내 방에 돌아오면 잠이 오질 않았다. 그때 나를 지켜 주었던 것은 더블 테크 CD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부모님 대신 '이문세의 별의 빛나는 밤'만이 지친 하루를 보낸 나에게 위로가 됐다.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겐 좋았다. 불 꺼진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고 외로웠으니까. 고등학생 때쯤부터 나한테 한마디 상의나 어떠한 이야기도 없이 엄마 아빠는 서로 각자의 삶은 살았다. 아빠는 서울로 발령이 나셔서 서울에 집을 구하셨고 나와 엄마만 춘천에 남겨졌다. 고등학생이라 전학을 하면 오히려 더 힘들다고 말은 했지만... 서로 가족이 헤어져 사는 것만큼 안 좋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혼자 그 집을 지키는 날도, 혼자 잠을 자는 날도 많았다.











비밀 많은 아이


지역사회라 그런지 아이들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출신이기에 서로 친했지만 나는 혼자 겉돌았다.

몇몇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핀란드에서 잘 때는 자일리톨 껌을 진짜 씹으며 자냐고 질문도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 별명은 핀란드에서 살다 온 덕분에 많았다. 자일리톨, 휘바휘바, 핀란드였다.


마음을 터놓고 지낼 이렇다 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잘 됐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나는 비밀이 많은 아이가 되기로 했다. 어디에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 어느 대학이 목표인지를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지만 물어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선발 집단에서 심화반까지 하면서 대학입시에 매달리는 아이들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난 그때 내가 더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가면으로 가린 진심


나는 고등학교 시절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나의 가정사나 어려움들을 숨기기 위해 밝은 척하며 가면을 쓰고 살았다. 아이들은 내가 부모 덕분에 외국에서 살아 재외국민 특별 전형으로 대학을 간다고 부러워하면서도 대놓고 비난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 나도 외국에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냐. 니들이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기나 알아? "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고 싶으면서도 아이들이 추측하대로 거짓 행동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 있는 척, 잘 사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내 감정을 숨기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모도 모두 정서적으로 내 곁은 떠난 느낌이었다. 춘천에서 고등학교 생활은 언어만 통할뿐 또 다른 낯선 도시에 나 홀로 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소녀의 탈출구



왠지 나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항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불안한 느낌이 자꾸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불안함과 외로운 현실을 잊으려고 책에 빠져 들었다. 소설책 시 그리고 수필을 하루에 몇 권씩 읽었다. 이젠 더 이상 영어 책이 아닌 모국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조금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학교 앞 도서 대여점에 있는 시와 소설책은 거의 다 볼만큼 난 책 속에 빠지게 되었다. 책 속에 빠져들면 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드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잊게 해 주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문학소녀라는 별명이 생겼지만 왠지 사람들은 나를 비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2가 되자마자 난 미술을 배웠다. 미술은 내게 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 맘대로 그려도 되는 세상. 내 맘대로 상상해도 되는 세상이 난 좋았다. 엄마 아빠는 그냥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많은 반대를 하셨지만 난 기어코 이번 만은 내 맘대로 하겠다면서 미술부를 하게 됐고 다소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했다.











선생님을 좋아한 아이


그리고 나는 일탈이 필요했을까? 학교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다. 아이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 선생님이 뭐가 좋냐? 공부는 안 할 거냐?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난 그냥 맹목적으로 그 선생님이 좋았다. 수업할 때 웃으시는 게 꼭 나를 위해 웃어 주는 것 같았고 따스했다. 난 그때 내가 지은 시나 글들을 선생님께 손 편지로 보내곤 했다. 3년 정도 동안 무려 367통 정도 보낸 것 같다. 그 많은 편지를 보내면서도 나의 속마음이나 나의 어려움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때 즐겨 읽었던 시집이나 산문집에 나오는 글들을 모아서 이쁘게 꾸며서 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현실 도피처로 책 속으로 파고든 것처럼 나는 그 선생님에게 집착했다. 여고생이었기에 그 선생님 수업 시간에는 괜히 혼자 떨렸고 혼자 수줍었다. 그 선생님 수업 시간표를 미리 알아 놓고 다른 반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선생님을 볼 생각으로 쉬는 시간에는 선생님의 동선을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막상 뵈면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게 다이면서.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고 힐링하는 느낌이랄까? 아무도 알아주거나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일탈은 내게만 소중했고 감사했다. 그 힘든 3년을 버티게 해 준 것 같아서 아직도 그 과학 선생님이 잊히질 않는다.






응원의 편지


고3 10월 재외국민 특별 전형시험을 보러 서울에 가던 날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받았다. 과학 선생님께서 써주신 편지라고 했다. 친구는 내가 그 선생님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대입 실기 시험을 보러 가는 내게 어떤 힘이라도 되고 싶어서 선생님께 나에게 응원하는 메시지를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했다고 했다.


난 너무 좋기도 하고 떨려서 그 자리에서 읽어보지 못하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편지를 읽게 됐다. 에이포지에 검은 볼펜으로 눌러쓴 편지 첫 소절을 읽자마자 난 눈앞이 안보였다. 누군가에 받아보는 첫 응원의 편지. 그리고 친구의 노력이 너무 감사했다. 서울에 가는 3시간 정도 동안 나는 눈이 빨게 있었다. 시험을 치는 내내 나는 친구와 선생님의 응원글을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 그리고 난 그 실기 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했다.


누군가에게 듣는 따듯한 말이 이렇게 사람을 힘이 나게 하는지 나는 몰랐다. 물론 선생님은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응원의 메시지를 쓴 것이지만 난 그 편지 한 장으로 천군마마를 다 얻은 듯 힘이 났으니 친구의 예상은 적중했고 난 행복했다. 난 그때 누구에게라도 인정받고 싶은 인정 욕구가 높았나 보다.







나를 이해해 주고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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