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생처럼 대학생활을 하다
돈, 실력 어느 것 하나 내 세울 것 없던 그 시절
나의 노력과 뻔뻔함만이 살길이었다.
" 이제 저와 상담한 지도 8개월이 다되어 가네요. 도움은 되고 있는 것 같나요? "
" 신기해요. 예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 묻고 기억하고 답하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
" 다 지난 일을 들춰서 더 힘들기도 했고요. 근데 요즘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감정을 숨긴 게 독이 된 것 같아요. 나도 마음껏 그때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선생님께서 함께 울어주셔서 많은 위로가 된 것 같아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도연 씨는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오늘은 내가 책을 하나 소개해 주려고 해요. 존브레드 쇼가 쓴 『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라는 책입니다. 도연씨가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권유를 받자마자 심리 상담 수업을 나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예스 24에서 난 그 책을 당장 구매했다. 도착한 날부터 나는 푹 빠져서 읽었다. 너무나 나의 이야기를 쓴 것 같은 책은 내용에 나는 매료되었고, 그 책에 쓰여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내면 아이 때문에 성인이 돼서도 여러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한 개인의 성격에 그리고 결정에 얼마나 미치는 파급효과가 큰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책을 밑줄까지 치면서 공부하게 되면서 아직도 크지 못하고 상처받은 채로 내 무의식 속에서 아직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나의 내면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 자. 오늘 수업 시작해 볼까요? 도연씨가 일러스트레이터 겸 디자이너라고 제게 소개했으니 미술 전공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계속 도전을 했나 봐요?"
"네. 저는 미술을 늦게 시작한 편이지만 미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
" 대학교 때는 혼자 살았나요? "
" 네. 민박도 하고 자취도 하면서 혼자 살았어요. "
" 대학교 때 이야기 좀 들어 볼게요."
첫 등록금
대학교에 붙어도 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분명 좋은 회사에 가면 우리 가정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2월까지 등록금과 입학금을 내야 하는데 그 여력이 안 됐던 것이다. 지금 기억으로 3백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다. 등록금 마감일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조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점점 희망은 없었고 지쳐가면서 나는 내 팔자에 무슨 대학이냐는 생각을 하면서 자포자기한 것도 같다.
어느 날 아빠 동기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빠 회사 사옥에 있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분을 만났다. 손에는 하얀색 봉투가 들려 있었고 겉에는 아빠가 취업한 기수 동기들의 메시지가 짧게 쓰여있었다. 내가 등록금도 못 낼 위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아빠의 동기분들이 십시일반 내 첫 등록금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비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 손은 흰 봉투를 내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혹시나 돈을 흘리진 않을까 누가 뺏어 가진 않을까 점퍼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흰 봉투를 꼭 쥐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등록금 마감일 2~3일 남겨주고 난 그렇게 첫 입학금과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아빠 회사 동기들이 등록금을 모아 줬을 때 어땠나요?
" 감사했죠...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
" 다른 감정은 없었나요? "
" 자존심이 팍 구겨지는 것 같았어요. 그때 다짐 했죠. 다음번엔 무슨 수를 써서 라도 남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장학금을 사수하라
다른 대학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우리 학교는 전액 장학금이 없었다. 대신 많은 학생들에게 차등을 주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나마 과에서 한 학기 학점을 일등을 하면 70% 퍼센트의 학비를 장학금으로 받을 수 있기에 나는 입시 때 보다 더 열심히 했다. 대학생이니 알바를 할 수 도 있었지만 엄마는 반대하셨다.
아직도 그때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난다. " 엄마가 피는 팔아서라도 등록금을 해줄 테니 너는 아르바이트할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무조건 공부만 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멘트였다. 엄마는 아빠가 대학생일 시절에도 장학금을 받는 게 최선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도 내가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엄마는 두세 번 정도 저런 말씀을 하셨다. 과톱을 해서 장학금을 받는 일이 엄마한테는 쪽지 시험에서 백점을 맞는 것처럼 쉬운 일인 줄 알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싫었던 레퍼토리는 '피를 팔아서라도'였다. 엄마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볼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인지 알지만 그때 내게 저 말은 무언의 압박 그 이상으로 들렸다. 흡사 협박 같았다.
늘 장학금을 받던 내가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했던 날도 있었다. 교양과목에서 C학점을 맞은 날이 기억이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C학점인지 알 수 없었다. 시험 성적도 좋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과목도 아니었다. 그 과목 때문에 50%의 장학금도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나는 그 교양 과목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실은 비어있었고 과사무실 조교가 교수님은 안 계시다는 말만 할 때 나는 교수님이 오시길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그 과사무실에서 5시간이나 기다린 적도 있다. 교수님은 나와의 만남을 피하셨고 대신 조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저학년이 교양 과목 하나에 목숨을 거냐고. 야간 대학생도 같이 듣고 4학년 졸업생 취업을 위해 저학년 때는 C를 맞아도 괜찮다. 너도 나중에 졸업할 학년이 되면 그런 베네핏이 있을 거다."라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양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해서 원래 내 점수를 주시라고 난 조교에게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하지만 교수님은 며칠 동안 만나지 못했고 난 그냥 C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속상함도 잠시 난 그 길로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다행히 자취하던 방에 주인집 아줌마가 그 동네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몇 명을 내게 소개를 해주셨다. 엄마 몰래 영어 과외는 진행됐고 나름 여유돈이 생기게 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마저 엄마한테 발각되고 난 다시 열공해서 꼭 장학금을 사수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연애 금지령
엄마 아빠는 같은 지역 출신이고 초등학교 1학년때 심지어 같은 반을 했던 친구사이이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하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둘 다 미술부여서 지역 미술대회를 나가게 되면서 친해지게 되고 우리 엄마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큰일이 엄마에게 닥쳤다. 장군까지 단 할아버지가 예편하시고 사기를 당하시고 그것을 못 이기셔서 할머니와 동반 죽음을 선택하셨다. 엄마는 그때 손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은 부잣집 딸에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큰 언니는 이미 시집을 간 상태여서 엄마를 돌봐줄 누군가가 없을 때 아빠가 친구의 의리로 엄마를 우리 친할머니께 데리고 간 것이다. 갈 곳 없는 내 친구를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해 달라는 아빠의 말은 내가 지금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할머니는 오죽하셨을까 싶다. 그렇게 둘은 어찌하지 못하고 정의로움에 정에 이끌려 따로 방을 얻어서 사셨다. 그렇게 해서 내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엄마 아빠는 딸이 대학교에 가서 바로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임신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무슨 호안 마마라도 되는 것처럼 연애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사이 나는 우연하게 우리 학년 제일 나이 많은 오빠와 썸을 타고 있었다. 같이 살진 않았지만 매일 전화로 감시하는 탓에 조심조심 연애를 했다. 그게 나의 첫사랑이었다.
L 사에 취업하는 게 목표인 여대생
디자인 학부였기에 방학 때 대기업 인턴을 하는 학생들이 몇몇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쯤 나도 어느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조교랑 상의에 들어갔고 성적순대로 추천서를 써주는 L사를 목표로 나는 열심히 스펙을 쌓고 공부를 했다. 방학 때는 토익 시험을 보러 다녔고 학기 중에는 무조건 A학점을 맞을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 미술을 늦게 시작한 터라 내 실력이 많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다른 친구들이 축제를 즐기고 술을 마시러 다닐 때 미국 영화에 나오는 (NERD) 너드처럼 내 실력을 쌓는데 집중했다. 가끔 선배들이 혼자 과연습실에서 혼자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대학생 때 노는 거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겉면으로 드러나는 재외국민 특례입시에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 그리고 외동이라는 키워드들이 그들에게 주는 내 이미지는 부잣집 딸, 아빠 엄마 잘 만난 아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참 속 모를 소리들에 답답한 적도 많았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그동안의 서사를 구구절절이 말할 힘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때 남자 친구였던 남편에게도 나의 가정사를 말한다는 것이 창피도 했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온실에 화초처럼 자란 남편은 내게 늘 의구심을 갖았었다. 고등학생도 아닌데 고등학생처럼 공부하고 과제를 하는 내가 뭔가 특별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낮은 학점을 부당하게 맞았다고 싸움닭처럼 교수를 쫓아가는 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해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난 내가 자라온 환경이라던지 우리 집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예고 없는 휴학
학교 생활에도 적응되고 썸도 타고 있고 열심히 하던 내게 늘 그랬듯 휴학을 하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왜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페루에 발령이 나셨다고 했다. 대학생이고 어차피 자취를 하니 내가 휴학을 하지 않고 한국에 혼자 남아있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고 IMF와 여러 가지 집 사정이 좋지 않아 작전상 후퇴처럼 페루에 있는 관사로 가야 했다. 늘 예고 없이 던져지는 상황들 그리고 옴짝 달짝 못하게 그 상황에 순응해야 하는 내 처지가 나는 너무 싫었다. 나는 그렇게 첫사랑 남자 친구와도 1년의 휴학을 이유로 잠시 헤어져 있기로 했다. 휴학하는 이유는 적당히 어학연수를 간다는 핑계로 마무리했다. 남자 친구도 갑작스레 의논 없이 결정된 일에 적잖게 당황도 하고 화가 나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설명하고 설득할 이야기는 없었다. 이기적 이게도 그냥 그 상황을 너그럽게 받아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원치 않는 휴학을 하고 페루에 갔다.
내 의사 따윈 반영하지 않은 휴학을
어학연수라는 이름으로 이쁘게 포장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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