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직장 L사

프레젠테이션만 하는 디자이너

by 이도연 꽃노을




우리 딸이 대기업에 다녀요




꿈의 직장 L사에 합격하다


꿈꾸던 L사에 갈 수 있는 추천서를 교수님께 받았다. 막연히 한 해에 1-2명에게 주어지는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지 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 학점 순서대로 주어지는 혜택이기에 어떤 보장된 결과는 불투명했다. 다행히 그해 2장의 추천서가 오게 되고 다행히 난 그중의 한 장의주인공이 됐다. 늘 엄마가 말했듯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생각했다.




휴대폰 디자이너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부서이지만 2000년대 초반 휴대폰 디자인 팀은 인기가 좋은 부서였다. 난 면접에서 휴대폰 디자인팀을지원 했고 운 좋게 내가 원하는 부서인 휴대폰 디자인 연구소소속이 되었다.


신입사원들의 첫 디자인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첫 디자인 발표회가 열렸다. 각자 자신의 디자인을 열심히 뽐내며 발표를 했고 나도 그랬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기업 디자이라니 첫 발표가 끝나고 난 그동안의 고생했던 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오너처럼 일하는 신입사원


첫해에는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365일 일했다. 그 당시 역삼역에 위치한 디자인 연구소 앞에 자취방을 얻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했다. 출근은 8시 반까지였지만 난 늘 7시 40분까지 출근해서 우리 팀원들 책상 위 청소를 도맡아 했고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 목에 걸린 사원증이 휘날리도록 디자인목업집 회의등에 참여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나를 보고 낙하산이 아닐까 하는 오해도 많이 샀다. 신입사원이 오너처럼 뼈를 갈아 넣으며 일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두 번째 연도부터는 휴대폰 디자인 보다 디자인 회의 참가하거나 회사 소개를 영어로 하는 업무가 더 많이 주어졌다. 점점 나는 회의를 느껴갔다. 디자이너로 가 나는 앉아서 디자인하는 시간보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디자인 전략 설명이나 회사를 외국인 바이어에 발표하는 일에 투입되니 점점 권태기가 왔다. 다른 선배사원들이나 동기들은 해외 출장도 많이 가고 높으신 분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임원진들이나 해외에서 오는 회사 방문객들도 신입 2년 차인 나는 알아보고 찾았기 때문이다. 연말에 한 번씩 받는고 가는 좋았지만 그렇다 할만한 내 디자인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제품디자인을 전공하고 이 L사 휴대폰 디자인팀에 지원한 이유는 내가 디자인한 휴대폰을 사람들이 들고 다니며 쓰는 것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의 입사 3년째


선배 디자이너 들은 입사 3년 차 그리고 5년 차에 권태기처럼 퇴사를 할까 말까 하는 고비들이 누구에게나 온다고 했다. 난 믿지 않았지만 나에게도 입사 3년 차 그런 고비가 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 6년 전 헤어진 첫사랑과 우연히 연락이 됐고 난 그 길로 퇴사를 결정했다. 엄마는 그 좋은 회사를 왜 관두냐며 강경하게 반대하셨고 지인들도 나에게 배가 부르다며 퇴사를 말렸다. 하지만 난 이미 마음이 회사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고 첫사랑과 결혼까지 할 생각으로 퇴사를 감행했다.




결혼 그리고 유학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나는 모두가 만류하는 대기업을 퇴사하고 첫사랑과 결혼을 해서 유학길에 올랐다. 마치 뼈를 묻을 것처럼 일하던 직원이 하루아침에 퇴사를 하고 결혼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은 내가 속도위반임신이라도 한 줄 생각했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고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그곳에서 더 이상 앵무새 노릇을 하기 싫었다. 그해 여름 바로 결혼을 하고 첫사랑과 결혼을 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동반 유학길에 올랐다.




내가 선택한 삶 in 샌프란시스코


28살에 돌연 퇴사를 하고 결혼을 한 후 남편이 유학 중이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혼 생활이 시작됐다. 디자인학과 말고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전공을 바꾸어서 대학에 입학을 했고 남편은 3D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처음 책임져본 나의 첫 삶이었다. 뭔가 크게 한 것도 없는 데 짜릿했다. 그리고 한국의 쳇바퀴 도는 세상을 벗어나니 그때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삶은 내가 평생에 처음 맛보는 자유였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주체적인 삶을 그려가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얼마나 타인을 의식하며 진정한 나는 없는 인생을 살았는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많아지고 나는 한 번에 공황장애 불안장애 이석증을 앓게 됐다.


어렸을 때는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 생각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별반 다른 삶을 살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자각과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는 내 정체성과 나의 인생에 대한 회의가 한 번에 밀려왔다. 아주 끈적하고 끝없는 늪에 빠진 듯했다. 어디서부터 나를 알아가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내 인생이 꼬였는지 나다움을 되찾고 싶었다. 그렇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허우적 발버둥 칠수록 나는 더 깊은 우울에 빠졌다.





이미지 출처: unsplash.com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