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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May 09. 2024

어떤 날

단편소설


 봄의 끝자락에 와 있었다. 양쪽으로 연둣빛 잎사귀가 무성한 날씬한 나무들이 손짓하는 아름다운 산책로를 조금 무상한 기분으로 걷고 있었다. 내 안의 동그란 작은 폭탄은 포근한 것에 감싸인 채 잠잠했다. 나는 나 자신을 알아가고 있었다. 나 자신을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조련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쓸쓸함은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사실 포근한 것에 감싸인 작은 폭탄도 그 위력이 터무니없이 약한 것으로, 만약에 폭발한다고 해도 내 가슴을 폭발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양산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봄의 끝자락의 태양은 여름의 그것과 구분되지 않아 피부가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책이라도 한 권 손에 들고 있다면 그것으로 얼굴을 가릴 텐데. 나는 오늘 피부가 타는 것은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름다운 녹음을 바라보며 걸었다. 나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널찍한 산책로를 걷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용한 집들이 일정한 높이로 늘어서 있었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여기도 집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낮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 옆으로 이름 모를 노란 꽃이 한가득 피었다.


 그때 소리도 없이 자전거 한 대가 내 옆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호리호리한 남학생은 나에게도 익숙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긴 남색 교복 바지는 더워 보였지만, 부드러운 바람을 가르며 유유히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애의 모습이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남학생에게 잠시 멈춰 보라고 주문을 걸었다. 자전거는 미풍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러다 정말 나의 주문이 통했는지 남학생이 자전거를 멈춰 세우더니, 몸을 숙여 신발끈을 묶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신발끈을 묶던 남학생이 힐끔 고개를 돌려 나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남학생의 얼굴은 가무잡잡했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와 동문이라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기뻤다. 나의 두 발은 조바심 내지 않고 부지런히 자전거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갔고, 몸을 반쯤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학생 앞에서 조용히 멈추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그가 바람처럼 가볍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갔을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싶었다. 가까이서 보니 안경 쓴 남학생은 눈빛이 호수처럼 깊은 사람이었고, 말수가 많지 않을 것 같은 입을 가지고 있었다.


 “방해가 안 된다면, 산책길이 끝나는 데까지만 태워줄 수 있어요?”


 나는 헛기침을 참으며 말했다. 남학생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가 너무 순순히 부탁을 받아들여서 나는 지금이 꿈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바로 출발해버릴 것 같아서, 나도 말을 생략하고 뒷자리에 몸을 옆으로 해서 올라탔다. 내가 올라타자마자 남학생은 부드럽게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똑 같은 산책로인데 걸어서 갈 때와 자전거로 달릴 때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따뜻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아, 기분 좋네. 하고 혼잣말을 흘리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남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 때만큼은 말수가 없는 사람인 척하고 있었다. 남학생의 마르고 납작한 등에 땀이 배어 나와 동그랗게 젖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힘들긴 하구나. 게다가 나까지 태웠으니.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이기심에서인지, 그냥 이쯤에서 내리겠다는 말은 목구멍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태워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누군가의 뒤에서 자전거를 타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미안합니다. 무겁죠? 침묵을 뚫고 말했다.


 남학생은 고개를 살짝 움직였는데 그렇다는 의미인지, 아니라는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잡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천천히, 부드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느리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문득 아까부터 피부가 조금도 뜨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꿈 같은 그늘 속을 달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녹음의 그림자가 끝나는 지점에 햇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자전거는 그곳에 도달하는 시간을 앞당기지도, 미루지도 않고 일관된 속도로 나아갔다. 나는 남학생에게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의젓함을 느꼈다. 그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었다.


  “고마워요.”


 나는 멈춰 선 자전거에서 내렸다. 동그란 안경을 쓴 남학생은 아까처럼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내 발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신발끈 풀렸습니다. 하고 그는 상상도 못한 꿈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하고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햇빛 속으로 나아갔다. 나는 호리호리한 남학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 마구 흩어지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나뭇잎이 흩날렸다. 나는 몸을 굽혀 흰 운동화의 끈을 다시 묶었다. 다시는 풀어지지 않도록 매듭을 단단히 조였다.


 꿈에서 깰 시간이야. 신발끈을 다 묶고 일어나는 나의 귓가에 조용히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끝자락에 닿은 봄을 닮은 아스라한, 그러나 깊은 음성이었다. 눈물처럼 살결처럼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는 어깨에 걸친 책가방이 한순간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길을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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