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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Apr 30. 2024

꽃나무가 자라는 남자

단편소설


 조용한 봄날이었습니다. 남자의 옆구리 깊숙한 곳에 고통의 씨앗이 심어진 것은. 누가 그것을 심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바람이 스치는 느낌조차 일지 않아 남자는 자신의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고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남자의 옆구리에 평소와 다른 느낌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습니다.


  ‘어째서 자꾸 가려울까?’


 남자는 계속 옆구리가 근질거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증상이겠거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남자는 평소처럼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고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함께 카드 놀이를 즐긴 하룻밤의 친구들이 사라지면 적막한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남자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옆구리의 간지러움을 잊기 위해서 밤 늦게까지 술을 홀짝거렸습니다. 하지만 곧 싫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상대가 없는 밤. 술도 맛이 없었습니다.


 차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특별하고 정교한 불쾌감. 조심스러운 손이 노크하듯 불행이 옆구리를 두드렸습니다. 무딘 동물의 발톱으로 긁는 것처럼 근질거리던 옆구리는 이튿날부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악 소리를 냈습니다. 너무나 생경한 아픔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고, 그는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자는 애써 잠을 잘못된 자세로 자서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창밖의 파릇파릇한 봄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밥을 먹으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남자의 희망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질 무렵 남자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지 못하는 천장에 대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정직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떠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급격한 우울감을 느꼈습니다. 옆구리의 통증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지금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고독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남자를 선뜻 찾아와 줄 사람이 있었습니다. 함께 카드 놀이를 즐긴, 닭과 여우와 말을 닮은 하룻밤 유희의 동지들이 아닌, 남자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타지 사람이 된 친구. K는 남자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싸구려 붓으로 그린 그림을 처음 사준 친구였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친구에게 바가지를 씌워 팔았던 늙은 호박 그림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느라,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밤기차를 타고 달려온 친구를 남자는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친구의 걱정하는 얼굴을 보니 잠시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끔찍한 공포에 직면한 뒤였습니다.


 남자는 이파리를 토하는 병에 걸렸다고 말할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미쳤다고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를 기다리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남자는 입안이 아직 씁쓰름했습니다. 남자는 정말로 자신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보러 멀리서 달려와 준 다정한 친구가 없었다면, 긴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생각하니 남자는 아찔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술이었습니다. 남자는 기괴한 현실을 잊고자 친구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친구는 피곤한 몸이었지만 기꺼이 술상대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진득한 회포를 풀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습니다. 다정한 친구는 몇 번이나 간곡히 의사를 부를 테니 만나보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남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한밤중에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어 변기로 달려가면, 어김없이 푸른 잎을 토했습니다. 밤에만 구역질이 치미는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남자는 이파리를 토한 후 거울 앞에 서서 상의를 들춰보았습니다. 활화산처럼 부어 오른, 붉고 딱딱한 옆구리는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몰골이었습니다. 토한 밤에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흔들리는 밤에는 반드시 이야기상대가 필요했습니다.


 다정한 친구가 구해준 진통제를 먹으면 고통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불행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남자는 옆구리가 찢어지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깼습니다. 옆구리가 찢어지고 그 안에서 검은 팔이 튀어나왔습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옆구리를 더듬어 만지니, 괴롭다는 느낌이 들 만큼 심각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남자는 옆방에 있는 친구를 불렀습니다. 남자는 친구에게 지금 칼이 있으면 자신의 옆구리를 좀 찔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통에 눈이 먼 남자는 과격한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긴 했지만,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봄비가 자욱하게 내리는 밤에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여자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K는 여자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정말 즐거운 이야기였습니다. 남자는 아무래도 오래오래 살긴 그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자 이야기를 한 뒤라 그런지 남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습니다. 사랑이란 것을 해보기도 전에 옆구리가 터지고 이파리를 토하는 병에 걸려 죽다니. 남자는 아직도 운명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스며들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머리맡에 가만히 앉아있는 친구에게, 한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날이 밝고 젖은 흙의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남자는 친구가 구해준 물감과 붓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책은 매일 똑 같은 책을 보다 보니 질렸습니다. 술은 언제 먹어도 좋았지만, 이제 친구와 술을 마셔도 할 이야기가 딱히 없었습니다. 친구는 걱정되는 마음은 그대로지만 버리고 온 생활이 생각나는 눈치였습니다. 슬슬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친구가 자신을 위해서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필요했지만, 억지로 붙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림을 한 장 그렸습니다.


 나뭇가지에 살포시 앉은 새하얀 문조였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K는 그 새하얀 문조의 부리에 가슴을 쪼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확실히 있었던 사람의 반응이었습니다. 남자는 미안함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K는 좀 더 머물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집에 봄바람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습니다. 얼굴에 점이 많고 활동적인 분위기의 젊은 여자가 막 집에 들어섰을 때, 남자는 불행하게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었습니다. 거동할 수 없는 주인 대신에, K가 조용히 여자를 맞아주었습니다. 여자의 방문은 K가 만든 일이었습니다. 그는 여자에게, 그녀를 십 년간 마음에 품은 남자가 희귀병에 걸려서 매일을 고통 속에서 보낸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얼굴에 점이 많은 여자는 안타까움과 묘한 감동이 뒤섞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십 년간 마음에 품었다는 동창생을 만나기 위해 방에 들어갔습니다.


 불행한 남자의 눈 감은 얼굴을 안타까운 듯이 들여다보던 젊은 여자는, 그의 머리맡에 꽃을 내려놓았습니다. 남자는 웃옷을 벗은 채 옆구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혹은, 무언가 사악한 기운이 잉태된 듯한 거대한 혹으로 보이는 남자의 부은 옆구리. 여자는 죽어가는 연인을 바라보듯이 남자를 바라봤습니다. 여자의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에서 쏟아져 흐르는 매혹적인 그리움의 냄새에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아, 못 알아보겠군. 그런데 알아볼 수가 있어. 여전히 얼굴에 점이 많구나. 여자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습니다.


 남자는 혼미한 고통 속으로 다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남자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와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험담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남자는 그들 앞에서 이파리를 토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남자가 자신이 다 설명하겠다고 제발 도망가지 말라고 애원하며 다가가자, 두 사람은 더욱 공포스러운 얼굴이 됐습니다. 남자는 다가가면서 계속 토했습니다. 새하얀 문조가 남자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새하얀 문조는 남자에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의 맞붙은 몸 사이로 날아갔습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남자는 쓸쓸하게 눈을 떴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 남자의 영혼은 미아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때 방문 너머에서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였습니다. 남자는 땀을 뻘뻘 쏟는 통증 속에서 그들의 나지막한 대화소리를 가만히 들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을 위해서 일상도 멈추고 여기에 와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방문 너머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는 문득 설명할 수 없는 소외감과 이상한 질투심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칼이 있으면 자신의 옆구리를 도려내고 싶었습니다. 고통은 지겨웠습니다. 남자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움직여보았습니다. 닫힌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한 줄기 새어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그 순간 끔찍한 토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파리, 이파리.


 남자의 두 사람은 차를 마시다 말고 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소리에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K가 먼저 벌떡 몸을 일으켰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어! 그를 돌보면서 일주일이나 있었는데, 나는 그가 왜 아픈지도 몰라. 당장 그를 끌고 가서 입원시키겠어. K는 거의 화를 내며 성큼성큼 방문 앞으로 향했습니다. 두 사람이 불렀지만 안에선 대답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붕대를 풀고 앉아있는 남자의 옆구리에서 작은 꽃나무를. 남자의 옆구리를 뚫고 자란 꽃나무에는 가지가 있었고, 가지에는 봉오리가 맺혀 있었습니다. 잎사귀도 무성했습니다. 


 내가 매일 겪는 이 영문 모를 고통이 아름다운 꽃나무로나 자랐으면! 언젠가 남자는 일기에 적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무서웠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몸에서 자란다면 과연 무엇으로 자랄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동안 차는 식어갔습니다.







사진: UnsplashLibrary of Con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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