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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Apr 06. 2024

결별

단편소설


 수십 갈래의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와닿은 여기에 나는 너를 묻는다. 흘러 넘칠 듯 피어 오른 화분의 꽃을 바라보면서 담뱃갑을 어루만지던 너는 이제 없고, 제 명을 다해 시든 꽃들만 조용히 있어. 나는 화분을 싱크대로 가져가 물을 듬뿍 주고 다시 식탁 위에 내려놓아. 화분의 머리 위에 걸린 들판 그림의 연둣빛이 가끔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만 빼면, 나도 그럭저럭 봄이야.


 술에 취해 식탁에 가만히 엎드린 채로 나는 나의 손등을 핥는다. 너의 눈물이 진짜 눈물이었다면 그 짠맛이 손등에 스며들었을 듯해서 나는 병든 고양이처럼 몇 번이고 손등을 핥는다. 그러나 짠맛은 나지 않고, 무미한 고독의 맛이 혀끝에 상처를 입히는 거지. 나는 혀를 다시 쏙 집어넣고 어느 늦은 여름날을 생각해. 나를 만나기 전부터 쓸쓸한 마음을 안은 너라는 걸 받아들였을 그 무렵, 너와 나는 부쩍 말이 없는 산책을 즐겼지. 침묵을 물들이는 석양의 붉은빛. 미완의 감정들.


 큰 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은 흙길 옆으로는 넓은 들판이 열기 머금은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때 불쑥 등장한 자전거가 나를 스치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너는 단호하게 나의 팔을 잡아당겼지. 너의 근심을 짊어진 무거운 등 뒤로 얼떨떨한 얼굴을 한 청년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어. 나는 가슴을 거의 너와 맞붙이다시피 하고 숨을 내쉬었지. 너의 목을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의 기묘한 것이 땀이라는 걸 깨닫자 황혼은 기담 속의 황혼이 되고 서서히 전부 고장이 나버렸지.


 전부 고장이 나버렸지. 그 여름날 맞붙은 가슴에 퍼져 나간 열정이 다시금 타오른 건 싸움의 밤이었는데, 나의 존재는 그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걸 너는 알까. 품을 수 없었던 건, 너의 거짓말들보다도 거짓말하는 걸 일종의 취미와 같이 가벼이 생각하는 너의 안일함이었는데. 나는 너를 거칠게 나무라고 흥분하느라 진짜 나를 상처 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지. 타성에 젖은 너의 거짓말 속에서는, 너 뿐만 아니라 너와 함께 하는 나도 왜곡을 피할 수 없으니 화가 났지. 나는 너에게 소유된 것들에—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과 우울의 유혹을 호흡하는 코와 무심한 음담과 거짓말에 능란한 그 입술에—지쳐 마음의 사자를 깨우고 너를 몰아붙였지.


 너를 몰아붙이면서 느끼는 자학의 감정을 설명할 이성을 갖추기 전, 이미 마음을 지배했던 건 황혼처럼 뜨거운 무엇. 그 순간 머리가 미쳤는지 너의 실없는 음담이 그리웠다. 마음의 사자는 너무 사나웠고 나는 사나운 것을 조련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나는 그래서 도망쳤지. 분노불만으로부터. 원인을 추적할 수 없는 무한한 불안으로부터. 나는 불안을 넘은 황홀함 속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스무 송이의 백장미를 엮어서 화관을 만들었지. 찔린 손가락이 아팠지. 그 아픔이 오히려 눈물을 앗아가 나는 후련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의 머리에 화관을 씌웠지. 너는 왜 그랬어?


 가시에 찔려가며 화관을 만들어줄 생각이나 했지 그 가시 없애 줄 생각은 못했던 나의 서툴기 짝이 없는 작품이 가련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지나간 씁쓸한 세월이 공연히 너의 가슴을 흔들었던 걸까. 분노하는 나를 보며, 두 사람의 근원적인 어긋남을 믿지 않는 나를 보며 너 답지 않은 감상주의에 발을 헛디뎠던 것일까. 너는 축축하게 눈가가 젖었더라. 너 지금 내 앞에서 울고 있다고 어떻게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있었겠니, 나는 입은 꾹 다물고 헐거워진 옷소매로 닦아줄 수밖에 없었지. 느긋한 급속도로 슬픔을 갈무리하는 너는 의젓했어. 나만이 어린아이 같은 욕심에서 손등으로 남은 눈물을 가져가듯이 닦아낼 뿐이었지.


 너의 이별 선물이 된 너의 시그니처 담뱃갑이 지금 내 손에 어여쁨을 받으며 희롱된다. 이별처럼 무상한 것엔 포옹처럼 무상한 선물이 어울린다고 고집한 나의 나태함을 조금은 후회하면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그저 그렇게 물고만 있는다. 포옹 따위를 줄 게 아니라 이 담뱃갑처럼, 손에 익을 수 있는 것을 그런 무서운 물질의 감각을 줘버려야 했나. 너에겐 이별을 추억할 물건이 없으니 나보다 심심하겠지. 그만큼 가벼우려나. 담뱃갑을 보면 그것을 다루던 너의 손가락 움직임이 생생하니 떠올라 즐겁지만, 이런 디테일은 이제 잊으려 해.


 속을 파먹는 치명적인 공복으로 손이 떨릴 때 담배를 들고 피우면, 어느덧 떨림이 멈춘다고 실없이 좋아하던 얼굴 같은 거 말이야. 봄을 맞이한 일상을 장식하기엔 솔직히 케케묵은 느낌이야. 접을 수 없는 사랑의 일부분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건 황홀하게 임종한 생명에 물을 주며 가꾸는 것과 같은 일. 미련 돌보기. 여기 와 있는 봄이 전하길 나는 이제 스스로를 생각하고 들여다볼 시간이래. 추억의 분실이 착실하게 진행되는 밤마다 술은 내 안에서 별빛처럼 반짝여.


 별빛은 자비로워. 이 밤에는 특히. 나는 창가로 다가가서 완전히 포만한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어. 달은 참 해를 닮았어. 하지만 달은 아무리 넋을 놓고 바라보아도 눈이 멀지는 않지. 뜨겁지도 않지. 뜨거운 봄날의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에, 넋을 놓고 아기자기한 감정에 잠겨 있느라 실명이 되든 말든 멍하니 해 바라기를 하는 나를 지나치지 않고 조용히 다가와, 그 건조한 손바닥으로 나의 눈을 가려줬던 너지. 그런 너였지. 너의 손바닥이 만든 임시적인 어둠이 나에겐 영원의 우주 같았다.


 우주의 기준에서는 이토록 완벽한 보름밤도 찰나이겠지. 우주는 연인과 먼지를 구분하지 않겠지. 그래서 너는 연인이라는 말에 쿨럭거렸던 것일까? 이제 보니 밤하늘이 참 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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