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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24. 2023

사사로운 공복

단편소설


 윤. 나는 오늘 밤에도 건반 위에서 휘몰아치던 너의 손가락을 그리워한다. 시린 겨울 하늘을 향해서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아른거려. 너는 잘 지내?


 너는 떠난 사람이고 우리는 남은 사람이지. 떠난 사람에게 보내는 남은 사람의 편지를 나는 좋아하지 않아. 떠난 사람은 과하게 신비해지고, 남은 사람은 묘하게 가식적으로 보이게 되거든. 무슨 소리냐고. 이렇게 말해볼까. 그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은 사람은 선량하다는 오해를 받아. 비극적이고 선량한 인물의 미련은 아름다우니까.


 내 안에도, 악은 있다. 네가 너의 축복받은 열 개의 손가락으로 분출하는 내면 깊숙한 곳의 악. 바로 그것. 내게도 있어. 내면의 악이 정확히 무슨 장면을 추구하는지, 네가 연주로 얼버무린 것처럼 나도 나의 악을 그저 글의 분위기로 표현하고는 해. 정확한 묘사는 웬만하면 피하지.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야. 나는 내 안의 못돼먹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 그래서 묘사할 수도 없는 거야.


 윤. 내가 아무래도 헛소리를 한 것 같지. 얼버무리다니. 우상에게 어떻게 그런 표현을. 나의 실수야. 네가 지금 어디선가 내 마음을 들을 수 있다면, 나를 용서해주기를 바라. 너는 나보다 몇 배는 자기집착적인 사람이니 너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있겠지. 너는 건반 위에서 한 줄의 마음의 소리도 얼버무리지 않지. 자신을 모르는 건 나야. ‘우리’에 포함되는 사람은 두 명이지. 나와 열. 열은 너의 부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선율을 찾는 데 땀을 쏟고 있어.


 열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자기집착적인 사람이니, 분명 자신만의 연주를 완성할 거야. 열은 당연히 네가 우리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 열은 너의 방황이 기쁜 눈치야. “인간인 거야.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열의 말이야. 열은 이 말을 할 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어. 나는 그런 열이 왜인지 싫었지. 열은, 정말로 네가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는 걸까?


 열은 너와 동등하다고 느낄 때 기쁜가 봐. 물론 우리 셋은 친구라는 동등한 사이로 묶여 있지만, 나는 너의 비상한 재능에 압도당하는 순간을 무척 사랑해. 그게 열과 나의 차이지. 사실 더 많은 차이가 있어. 열은 자신을 갈고닦아 너에게 꿇리지 않는 예술가가 되길 원해. 나는 자신을 갈고닦아 너에게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 되길 원해. 열은 너를 추월하는 것을 은근히 욕망하고, 나는 너를 그저.


 내가 치유해 줄 수 있는 병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진단해. 내가 치유해 줄 수 있는 병을 내 손으로 유발하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 네가 그런 병을 주머니에 넣어 오길 바랄 뿐이야. 병과 이국의 바람과 깃털 따위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귀환의 미소를 짓는 너. 더욱 길어지고 섬세해진 열 개의 손가락. 혼과 우수가 의연히 포옹하는 눈동자.


 보고 싶을 뿐이야. 기억해? 윤. 어느 취한 밤에 건물 옥상에 셋이 올라가서 바람을 맞은 일. 거리에는 벚꽃잎이 흩날리고, 우리의 가슴엔 자유의 날개가 돋아나고. 너는 날개를 펼치듯이 양팔을 활짝 펼치고 하늘을 향해서 조용히 읊조렸지. 너희를 사랑해. 하고.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린 채로 서 있는 너는 금방이라도 비상할 것처럼 보였지. 열은 흥분했고, 나는 불안했어. 애써 흥분하면서 나는 너의 모습과 도시의 밤을 추억으로 아로새겼지.


 너에 대한 마음 없이는 나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해. 열도 그럴까? 열은 너에 대한 마음 없이도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낼 수 있을까. 나는 열이 그럴 수 있기를 바라. 나만의 우상이던 존재를 하나뿐인 친구가 사랑하게 됐을 때, 나는 친구의 영리함을 진심으로 추켜세웠어. 나만이 이해하던 너의 선율 속 괴로움, 희망, 나르시시즘 등을 열이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 그래, 너도 여기서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한 번 호흡했지. 나도 호흡을.


 열이 나보다 너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없었으면 좋겠어. 나보다 너를 덜 사랑했으면 좋겠어. 아니, 아니. 다 너의 잘못이야. 왜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야. 내가 열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아. 너는 지금 내가 자폭한다고 생각해? 윤.


 나는 열을 좋아해. 내 하나뿐인 이해자거든. 너에 대한 나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는 건 이 세상에 열, 하나밖에 없거든. 열은 알고 있어. 내가 단순히 너의 절제된 연주의 매력에만 푹 빠진 것이 아니라는 걸. 네가 떠나고 나서 나를 위로해준 유일한 친구가 열이야.


 나도,


 너희처럼 나에게 집중하고 싶어.


 아. 결국은 너와 열을 ‘너희’로 묶어버리는구나. 나는 한걸음 물러선 채 자기에게 골몰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구나. 나는 나를 상대해주는 사람 없는 밤에도 나 자신을 보지 않아. 나는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어…….


 어때? 내 말이 솔직하다고 생각해? 생각보다 너무 솔직한 것 같아서 놀라고 있니. 만약에 정말 그러고 있다면 너는 나를 미워해도 돼. 윤. 나는 결코 완전히 솔직해지지 않아. 네가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진심도 전부 나의 검열을 거친 것들이야. 그냥 튀어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래서 날개를 펼친 너의 뒤에서 너를 흉내내지 않았어. 아니야, 미안해. 그럴싸한 문장이지만 거짓말이야.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네가 날개가 있다고 정말 착각이라도 할까 봐, 네가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한 걸음만 더 가까워지면 너의 몸을 붙잡으려고 불안한 눈동자를 흔들고 있었을 뿐. 열은 도취된 얼굴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너의 독백적 고백을 소화하고 있는 듯했지. 나는 사실 그곳에서 열은 안중에도 없었어.


 내가 아프고 있는 집에 와주지 않을래. 와서 꽃병에 꽂힌 생화의 향기를 맡아보지 않을래. 생화가 꽃병에 꽂힌 지는 얼마 안 됐어. 싱싱해. 보라의 소국이 아직 꽃피우지 않은 장미를 감싸고 있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면서 정열의 연주를 뿜어내던 너를 이 장미에서 피워내리라. 아아― 그럴 수 있을 리가. 장미만큼은 너를 은유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지 마. 궁금하게 느끼는 건 환영이지만, 나의 단순한 심술이라면 허탈할 테니까.


 엉망진창인 편지야. 하지만 나의 표정은 반듯하고 이런 것이 바로 균형이라고 생각해. 네가 없는 동안에는 열의 선율로 내 마음을 달래야겠어. 내가 열의 선율을 사랑하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윤. 이런 것을 묻는 추종자라 미안할 따름이야. 추종자인 주제에 친구의 사이를 포기하지 않는 욕심도 미안해. 불행한 밤을 보내고 있다면, 너를 맴도는 선율을 전부 악보에 기록해둬. 말하지 않아도 너는 그리 하겠지?







사진: Unsplashfreest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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