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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May 15. 2024

우아한 시체들의 도피

단편소설


 눈을 감고 천천히 열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느지막한 오후의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식힌다. 두 팔을 부드럽게 휘감는 바람. 속으로 아홉, 하는 순간 손등 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떴다. 아주 작은 벌레다. 나는 벌레의 여섯 다리가 우왕좌왕 허우적대는 모습을 구슬픈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반대편 손으로 벌레를 멀리 튕겼다.


 열을 세지 못한 탓일까.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옆 벤치에 아이가, 친구들과 놀다가 지쳐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게 된 조그만 아이가 앉아주길 기다렸지만, 어디에도 그런 아이는 없었다. 햇빛이 내려앉은 연두색 잔디밭에 붉은색, 하얀색 의자가 있었고 사람들이 께느른하게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낮은 평상에 드러누워 책을 읽는 아이, 독서는 재미없다는 듯 자꾸 친구를 찔러보는 아이, 거울을 보며 머리에 꽃을 꽂는 아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라는 흔해 빠진 형용을 참으려고 해도 달리 더 나은 표현이 없었다.


 아름다운 봄이었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잔디밭 너머에는 크고 반듯한 하얀 도서관이 우뚝 서 있었고, 묘하게 인자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늘이 햇빛을 가려주는 벤치에서 사람들은 혼자 바람을 맞기도 하고,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아예 드러누워 달콤한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사람의 희망을 고무하는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잎사귀들끼리 서로 몸을 비비며 스스스, 스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래된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느릿하게 뒤적거리다가 무언가를 꺼냈다. 옛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추억이 담긴 것이다.


 필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네 명의 여학생은 이제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나는 작가 지망생이 되었고, 가장 까불거리던 친구는 엄마가 돌아가셨고, 머리가 길고 예쁘장한 친구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세계 일주가 꿈이던 친구는 자신을 오래도록 괴롭힌 전공과의 절교를 선언하고 기초부터 제빵기술을 배우고 있다. 여전히, 여행 다니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들었다. 제빵기술을 배우고 있는 친구를 빼고 다른 두 명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세 명의 정든 친구들 사이에서 미소 짓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다시 구슬픔이 스며들었다.


 그늘 속에 홀로 앉아있는 것이 문득 춥게 느껴졌다. 나는 무성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D.H. 로렌스의 소설책을 덮어 오래된 가방 속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다른 각도에서 봄을 바라보고 싶었다. 길 양쪽으로 잎사귀가 풍성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조용한 산책로를 걸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두운 그늘이 없는 곳에 놓인 두 개의 벤치를 찾았다. 여기서는 눈을 감고 열까지 셀 필요가 없었다. 한 개의 벤치를 이미 두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두 남자가 앉은 벤치 옆에 있는 벤치에 앉자고 결정하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제수씨 관절은 요즘 어때?”

 “비만 오면 아프다고 하지 뭐. 그냥저냥 지내.”


 관절이 아픈 아내를 가졌다는, 단정한 셔츠 차림의 남자는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멋있는 사내였다. 그의 젊은 아내는 어린 나이에 관절염 때문에 고생 중인 것 같았다. 친구의 아내를 걱정하는 마찬가지로 이십 대 후반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는 창백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딘가 서늘했다. 나는 키 작은 나무 옆에서 오만한 풍모를 내보이는 모란꽃의 화려함에 정신이 팔린 척 그를 힐끗 보았다.


 그는 내가 자신을 곁눈질로 훔쳐본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창백한 남자는 회색 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빼 들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담배를 끊는 건 포기했다며 웃었다. 친구가 뒤쪽으로 가면 흡연 구역 있으니 거기서 피우라고 답답하게 나오자, 그는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친구에게 너는 옛날이랑 변한 게 없다고 욕을 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저 둘이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다면, 흡연 구역 이야기를 꺼낸 남자는 답답한 모범생이라는 나무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갖가지 자유로운 행각들을 말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 같은 남자가 결국 친구의 정직함에 못 이겨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자, 그의 친구는 잘 생각했다고 칭찬했다. 참 신기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친구는 자기 아내의 여고 시절 친구 중 하나를 남자에게 소개해줄 생각이었으나 그 여자는 담배 냄새에 찌든 미술가는 못 만난다고 단칼에 거절한 모양이었다. 친구가 전하는 우스운 이야기에 남자는 소리 높여 웃었다. 남자는 친구에게 자신은 거기에 돈까지 없으니, 제수씨의 귀여운 친구가 이런 자신을 보면 얼마나 끔찍함을 느끼겠냐고 했다.


 “그리고 이기적인 거야. 나는 이제 얼마 살지도 못하는데……”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찾으려고 가방을 뒤적이던 나의 손이 뚝 멈추었다. 어째선지 가슴이 뛰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모두가 삶이 허락한 아름다움에 취한 봄날에……? 나는 버벅거리는 손길로 계속 가방을 뒤졌지만, 오는 길에 흘렸는지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사진을 찾으러 갈 기분이 아니었다.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처음 본 타인의 비밀. 아름다운 봄날을 만끽하는 모든 사람이 그가 곧 병으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단잠을 계속 헤맨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잔소리하는 친구를 둔 창백한 미술가는 사람들의 무지한 행복과 안녕을 은은한 미소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은 세상이 아닌, 자신의 운명을 응시하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두 남자는 차분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죽을 운명을 가진 남자가 이따금 학창 시절의 추억을 꺼내면, 그의 친구는 남자보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추억을 복기하며 “너를 말리느라 힘들었다” 말하면서 잔잔하게 웃곤 하는 것이었다. 술집 뒷골목에서 덩치 큰 폭력배와 맞닥뜨린 밤의 이야기를 나는 집중해서 들었다.


 나는 그들의 누긋한 우정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기억을 동행했다. 남자는 모란꽃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함과는 다른 남성적인 화려함이 느껴져 괜히 보고 있으면 우울하다고 말했다. 친구가 털털하게 웃으면서 모란꽃이 화려한데 어째서 네가 우울하냐고 묻자, 저놈은 꽃의 세계의 황제인데 나는 인간 세계에서 스러져가는 모래성이란 것이 남자의 대답이었다. 황제의 여유를 봐. 아름다워. 홀린 듯이 남자가 말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날 밤 나는 목적 없이 종로 일대를 걸었다. 나의 오래된 가방 속에는, 우울한 눈빛을 빛내는 D.H. 로렌스의 초상화가 표지에 그려진 책이 들어 있었다. 초콜릿도 몇 개 있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밤의 거리는 활력이 넘쳤다. 대형 버스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깊은 밤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달려갔다. 나는 다리가 아팠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미묘할 때 목적 없이 걷는 버릇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원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황제를 만났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었다. 황제의 붉은 자줏빛 망토를 두른 남자는 모란꽃의 수술처럼 황금색을 뿜어내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나의 마음에서.

 

 깜깜한 밤하늘에서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하얀 달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모퉁이를 돌자, 거짓말처럼 그가 나타났다. 내 마음의 황제였다. 그는 가로등 아래 구석진 곳에서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향해 서서 친구와 나란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심하게 야윈 몸이었지만, 친구에게 농담을 건네는 얼굴만큼은 생기가 넘쳤다. 왼손에 묵직해 보이는 쇼핑백을 든 친구는 병자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유머였을 것이다. 그러고 친구는 담배를 꺼뜨리고 남자에게 기다리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친구는 어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았는지, 병든 남자를 남겨두고 위스키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나는 쌀쌀한 바람이 흐르는 밤 뒤에 숨어서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키 큰 몸 아래로 죽음의 그림자가 느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그리워할 것 같았다. 창백한 황제는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뿜더니 아주 슬픈 눈빛으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주위의 모든 것의 움직임이 멈추고, 흔들리는 것은 그의 머리카락뿐이었다. 얇은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날 밤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은 남자. 오십 년 뒤에도, 백 년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달을 바라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래성의 운명을 슬퍼했을까.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위스키 가게에 들어간 친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밤의 어둠 뒤에 숨어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서서히 내게 하나의 목적이 스며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왔던 곳을 잊어버렸다. 그래,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도피를 택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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