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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May 31. 2024

회고


 왜 갑자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을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지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 지금 같은 때 부담 없이 늘어놓을 수 있어서? 글쎄. 모르겠다. 그는 일이 년 전에 내가 몹시 좋아했던 배우로,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정신도 육체도 튼튼하기 그지없는, 말하자면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선 손상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노래하는 사람이었고, 노래할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꾸었던 꿈들, 감정들, 그리고 홀린 듯이 썼던 수많은 단편도 가슴에 묻었다. 그는 남성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이 거의 없던 나를 변화시킨 장본인이었으며 나는 아직도 그것이 그의 죄라고 생각한다. 가벼운 농담일 뿐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우스운 기억이 있는데, 나는 그가 너무 좋은 나머지 학교 글 모임에 내 마음을 그대로 폭로하는 텍스트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여기서처럼 익명의 ‘그’라고 칭하긴 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건 제정신이 아닌 짓이었다. 나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전부 적을 수는 없다. 물론, 아무리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그게 뭔지 떠오르지는 않지만, 할 수 없는 이야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애초에 무대에 서는 배우를 몇 년 동안 사랑한 경험을 고백하는 것부터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 고백이 나의 글쓰기와 하루의 마무리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하지만 나는 달리 쓸 만한 주제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불확실한 기분으로 이어나가려 한다.


 순수한 소년이기도 했고, 농익은 성인의 냄새를 풍기는 남자이기도 했던 그는 하나의 몸속에 몇 개의 인생을 품을 수 있었다. 배우란 그런 존재일까. 나도 배우가 하고 싶었다. 물론 나는 배우의 자질이 전혀 없고, 배우가 하고 싶었다는 말도 큰 의미 없는 혼잣말이긴 하지만, 나는 이따금 무대에 서는 인생이 부러웠다. 무대에서의 삶은 극적이고 역동적이고 발칙하며 자유롭다. 나의 눈엔 그렇게 비쳤다. 흘러넘치는 절제, 폭발하는 침묵의 내재화도 탐이 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단 것이 부러웠다. 관객석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도 물론 값진 것이지만, 무대 위에서 느끼는 섬세한 도취의 감각은 특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배우가 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나는 나의 표정과 손짓과 몸의 움직임을 통해, 그리고 말투와 목소리를 통해 아름다운 예술을 만들어내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차라리 남의 그것에 대한 영원한 관객이 되고 싶었다. 나에겐 글을 쓰는 손이 있을 뿐, 춤추는 나비들에 둘러싸인 배우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하듯이 말하는 것이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실수라면 나는 좀 더 깨져야 한다. 나는 너무 감싸여 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유리 온실이 완전히 부서지는 날에, 나는 솔직한 사람이 되리라.


 내 글이 정신없고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내가 안정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차분하고 다정한 성격이지만 끊임없이 내적 고뇌와 충동에 시달린다. 무성에서 여성으로 침묵에서 목소리로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지금은 천국이며 지옥이다. 나의 내적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이 매일의 목표인데, 글만 잡으면 결심이 흐트러진다. 글은, 특히 오늘의 미련한 한 편의 글은 만취한 상태인 나를 받아주는 유일한 친구이며 다정하게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자유로울 것을. 고통 속의 장밋빛을 볼 것을.

   

 그는 밤의 태양이었다. 아니 그를 너무 좋아한 나의 내적 욕구는 밤이었으며 동시에 태양이었다. 나의 영혼은 낮을 거부했다. 이제는, 꿈을 꾸는 기분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낮이 좋았다. 밤보다. 밤은 피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다. 나는 지금 아마도 이십대의 기댈 곳 없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싶은 것 같은데, 지나간 기억을 먼지 속에서 꺼낸 건 실수였다. 하지만 후회할 필요는 없다. 나의 갑옷 같은 방어 기제가 나를 지켜보면서 위기의 모든 순간 나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되는 이야기는 전부 쏙 빼갔다. 텅 빈 도서관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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