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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n 02. 2024

평범한 일요일


 책상 앞에 앉은 채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창살 너머로 하늘색 하늘이 보인다. 하늘색 하늘. 이상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내가 바라보는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욕심 많은 하얀색 구름들이 여백의 미를 모르고 하늘을 온통 채우고 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의자에서 일어나 반대쪽 창문을 열면, 십 삼 층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소박한 동네의 모습과 길게 이어진 산의 우직함이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여름이다. 나는 그리고 여름에 태어났다.


 나의 계절— 여름. 다들 자신만의 계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건 꼭 자신이 태어난 계절일 필요는 없다. 지울 수 없는 추억이 향기처럼, 물기처럼 배어 있는 계절을, 자신이 태어난 계절보다 더욱 소중하게 느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아직까지는 여름이 가장 좋다. 여름을 상징할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배어 있는 삶의 기억들은 너무도 많지만 나를 어루만지는 완벽한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직은…….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을 코앞에서 바라보고 함께 대화를 나눈 마로니에 공원의 기억이 내게는 가장 특별하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다. 가을을 사랑할 수 있는 추억을 하나라도 가졌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요즘 새삼 추억의 힘과 소중함을 실감하는 것 같다. 사람은 꿈과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 하니, 나도 황혼의 푸짐한 식사를 위한 추억들을 많이 채집하고 보관해 둬야겠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몇 주 후면 시작되는 여름방학을 최대한 유익하게 보낼 생각이다. 혼자 바다를 보러 갈까. 잠을 자는 사람들 몰래 떠나는 밤기차를 타고 비밀스러운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멍청한 사건들로 가득한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왜 너를 잊을 수가 없는지 묻고 또 묻는, 유치하지만 감미로운 남자의 노래와 손때 묻은 책 한 권,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기록용 노트와 펜.


 오늘은 외출할 수 없는 날이지만 마음만은 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구름이 흩어진 일요일 하늘은 푸르고 평온하다. 내가 너무 인생의 평온한 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란 것을 이제 알기에,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오지 않고, 나뭇가지 위 박새의 졸음 같은 평화로운 시구를 데리고 논다. 그러다 보니 평화로움에 한 방울의 미온적인 긴장감이 더해진 시구를 읊조리고 싶은 듯도 하고, 무료한 나의 감정에 연분홍을 머금은 물방울을 똑 떨어뜨려 줄 사건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나는 추억을 갈구한다. 초콜릿 냄새가 나는 추억을. 꿈은, 초콜릿 향기일 뿐 진짜 초콜릿이 아니다.


 그래서 한 방울의 연분홍이 번진 꿈에서 깨어난 직후의 심정은 그토록 무상한 것이다. 뒷말은 생략이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누가 나를 찾아왔는지 말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몽상적인 바보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풀이 죽는다. 보잘것없는 추억들. 후회의 건조한 향기. 여름이 묻은 바람.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시계를 본다. 오후 네 시 사십 오 분이다.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얕고 즐거운 담소를 나누기 전,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중요한 할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책상에 앉아 쓰기 시작했다. 방문은 당연히 닫혔다. 답답한 기분이 들지만,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저녁 하늘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슬슬 나가봐야 한다. 어서 나와 저녁을 먹으라며 엄마가 나를 부드럽게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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