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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09. 2024

라넌큘러스

소설


 눈을 뜨니, 숲속이었다. A가 이번에는 나를 숲속으로 보냈구나. 나는 하는 수 없이 걸었다. 키가 높은 숲나무들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고, 날씨는 적당히 온화했다. 숲의 향기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초목의 향기로운 연둣빛 향기와 흙의 그윽한 체취가 뒤섞여 콧속으로 쉼 없이 밀려왔다. 새 지저귀는 소리는 정답고 맑았다. 희망으로 흘러가는 강줄기의 물소리 같다고 할까. 나는 부드러운 흙을 사뿐사뿐 지르밟으며 어딘지 모를 숲속을 내 집처럼 누비고 있었다.


 잎새 사이로 비쳐드는 가을 햇빛이 고인 자리에 빛 웅덩이가 생겼고, 그것들은 따뜻해 보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무릎을 살며시 꿇고 앉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빛을 담아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성스러운 동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털 색깔은 중요하지 않지만, 눈동자만은 장님처럼 하얀 성스러운 동물.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를 굳이 가늠하지 않았다.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도. 풍경은 비슷한 듯 달랐고, 다른 듯 비슷했다. 언제까지나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가 계속될 것 같은 느낌.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쯤에서 나와 A의 관계를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A는 소설의 주인, 그러니까 나의 창조주였고, 나는 A의 수많은 소설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나를 이 인적 없는 평화로운 숲속으로 인도한 것도 A였고, 나는 그녀가 상상한 이 장소에서 내 나름의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계속 걸을 뿐이었다. A가 상상한 이 장소에서는 아무리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마음이 내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A가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픈 것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조용한 방구석에서 퀭한 눈으로 펜을 사각사각 움직이고 있을 A를 떠올렸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땅 위에 솟은 나무뿌리였다. 나는 내가 미소를 짓는 걸 느끼며 나무뿌리를 향해 가볍게 달렸다. 그리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이 까지고, 고통이 느껴졌다.


 봐, A. 나 살아있어.


 그제야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잿빛, 흰색도 아니고 잿빛 스웨터에 낡아 보이는 군청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에나멜 구두를 신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우선 몸을 일으켰다. 왼쪽 무릎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흙 묻은 손바닥을 탁탁 털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에나멜 구두를 벗어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혹시라도 길을 가다가 유리 조각을 밟을까 봐 신발은 벗지 않았다.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하염없이 걷다 보니, 커다란 참나무 옆에 버려진 작은 통나무집이 보였다. 아직도 평화로운 오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통나무집 주변은 유독 어두웠다. 커다란 참나무가 만든 응달 속의 통나무집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문고리가 고장 난 문은 끼기긱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고, 나는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은은히 비쳐 들어오는 내부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당연히 바닥엔 먼지가 보얗게 쌓여 있었고, 작은 식탁과 의자, 텅 빈 나무 책장이 보였다. 텔레비전도 보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텔레비전 위에 초록색 화병이 쓸쓸히 놓여있었다. 나는 다가가, 화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는 생화가 꽂혀 있었겠지. 무슨 꽃이 꽂혀 있었을까.

   

 문밖에서 들여다볼 때는 몰랐는데, 문 바로 옆에 옷장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으니 죽은 나무 냄새가 났다. 짙은 나무색의 오래된 옷장, 왠지 안을 열어보면 온화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의 시체가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조금 오싹해졌다. 나는 홀린 듯이 옷장의 동그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당기자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시체는 없었다. 옷이 있었다. 옷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는데, 계절의 구분이 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뒤섞여 있었다. 아주 쿰쿰한 곰팡내가 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상하게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럴 것 같지만,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좋은, 엷은 향기. 냄새에도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백옥빛을 입혀야 할 것 같은, 바람결처럼 부드러운 향기가 아련히 코끝을 스치고 사라졌다. 슬피 죽은 사람의 옷장일까? 나는 생각하며 옷들을 살펴보았다. 발목까지 오는 꽃무늬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아름다운 옷이었으나 너무 아름다워서 탐이 나지 않는 옷이었다. 나는 원피스를 원래 자리에 도로 걸어두고 몇 번 더 뒤적이다 내가 입을 옷을 찾았다. 깔끔한 흰색 셔츠에 바지. 옷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옷장 문 안쪽에 달린 뿌연 거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바지에 멜빵끈을 연결하고, 회색 빵모자를 눌러 쓰자 안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거울 속의 나는 생기가 있었고, 어쩌면 A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빵모자 아래로, 두 갈래로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정돈했다. 망할 에나멜 구두만 아니면 더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 구두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나의 모습에 만족했다. 그 순간, 창밖에서 아니 그보다 더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녘 연못 위에 흐르는 안개처럼 아스라한 손놀림. 왠지 마음을 외롭게 하는 연주였다. 나는 홀린 듯이 통나무집을 빠져나와 피아노 소리를 따라 걸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가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이 외로운 평화 속에 갇힌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환희를 느꼈다. 길이 아닌 곳을 헤치며 걷다 보니, 바지는 금방 더러워졌다. 문득 통증이 느껴져서 아래를 보자, 다친 왼쪽 무릎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바지의 무릎 부분이 진하게 물들었다. 나는 응급처치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욕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연주는 나의 깊은 마음속 외로움을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곳으로 가는 일이, 내가 소설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A는 생각이 다를지도 몰랐다. A는 어쩌면 내가 통나무집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귓가에 스며오는 저 피아노 소리는, A가 의도한 것이 아닌 소설의 자생적인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A의 서술에 기대고 있는 건지, 소설의 독단적인 유혹에 홀려 A를 배신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건의 길로 들어선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A. 나에게 말해주면 안 돼? 내가 저 고독한 누군가의 연주를 따라가도 되는 건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면 내 발이 돌부리에 걸리게 해줘. 나를 멈추어 줘. 나는 무릎을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않았다. 누군가의 피아노 소리만이 나를 느긋하게 유인하고 있었다. 빽빽한 숲나무 사이를 헤치며 걷다 보니, 저 멀리 탁 트인 공간이 보였고, 햇빛이 고인 자리에 통나무집만 한 유리 온실이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안에 누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그곳으로 걸어갔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피아노 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흔적 없이 흩어졌다. 갑작스럽게 끊기는 게 아닌 부드럽게 죽어가듯 사라졌다. 덩달아 나의 걸음도 느려졌다. 나는 유리 온실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숲바람이 몸을 스치자, 외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A. 이곳은, 너무 고독해. 하지만 맑고 아름답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느덧 온실 앞에 다다랐고, 온실의 투명한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낡은 풍금처럼 보이는 피아노와 회갈색 소파, 온갖 초록 식물들은 나의 예상 범주 안에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 온실의 주인이 사람이 아닌 동물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얀 수사슴이었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성스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넋을 놓고 사슴을 바라보았다. 사슴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숲나무의 가지처럼 늠연한 뿔을 가지고 있었고, 걸음걸이는 우아했다. 피아노 앞을 느긋하게 서성거리던 그것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A.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지. 이건 당신의 마음이구나.


 나는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얀 수사슴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연주한 것입니까? 내가 나직이 물었고, 하얀 수사슴은 나를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털은 윤기가 흘렀고, 그리 건강한 풍채는 아니었으나 우아하게 마른 몸이 오히려 더 신령스럽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사슴의 윤기 나는 하얀 목을 쓰다듬었다. 털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이 사슴, 우아하게 마른 몸에 비해 뿔의 크기가 너무 컸다. 몸에 뿔이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뿔에 몸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해 격렬히 갈망하는 사람의 두 팔이 뿔로 변한다면,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웠다.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뻗어나간 뿔, 무엇을 갈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기이할 정도로 화려하게 자란 뿔의 완성에 깃든 어떤 의연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뿔을 어루만졌다. 영원이란 곳에 사는 단 한 그루의 나무의 살결을 만지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생각했다. 그때 무릎에서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축축하고 뜨거웠다.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나니, 사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진득한 피가 배어 나오는 나의 왼쪽 무릎을, 그 뜨겁고 축축한 혀로 핥아주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가 좀 더 핥아주기를 바랐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치유의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벨벳 소재의 회갈색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이리 오세요.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무턱대고 무릎을 들이대는 건 너무 폭력적인 듯해, 그가 스스로 핥아줄 때까지 다정하게 목을 어루만졌다. 하얀 수사슴은 잠시 나의 손길을 느끼는 듯 눈을 감고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의 다친 무릎을 핥아주기 시작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너무 짙은 치유의 감각은 안정보단 작은 혼란을 불러왔다. 뜨거운, 뜨거운 황홀함. 나는 생각했다. 뜨거운 천국이란 건 있을 수 없겠지. 아름다운 서정적인 지옥이 있을 수 없듯이. 나는 녹아버릴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하얀 수사슴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나는 야릇한 미소와 마주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신 사람이죠? 내가 나직이 물었다. 그러나 하얀 수사슴은 언제 야릇한 미소를 지었냐는 듯, 언제 나의 무릎을 정성스레 핥았냐는 듯 한없이 고요한 검은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서정적인 깊은 눈동자였다. 맑은 근심이, 우아한 탐욕이, 천진한 슬픔이 깃든 눈동자를 마주 보니,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하지만 속된 것으론 배를 불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소파 옆 작은 탁자에 놓인 꽃병으로 눈을 돌렸다. 하얀 수사슴은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라넌큘러스의 꽃잎을 하나 똑 따서 입에 넣었다. 식물 맛. 속되지 않은 맛. 나는 천천히 음미하며 꽃잎을 씹었다.


 배고프지 않나요? 자.


 나는 라넌큘러스의 꽃잎을 다시 똑 따서 하얀 수사슴에게 건넸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거절하지 않고 꽃잎을 먹었다. 꽃잎이 씹히면서 은은한 향기를 흘리는 것 같았다. 하얀 수사슴은 다리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유리 온실의 아늑함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피곤한 탓인지 잠이 왔다. 나는 백조처럼 몸을 웅크린 하얀 수사슴을 느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눈꺼풀의 움직임이 느려진 까닭은 눈꺼풀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피곤한 몸을 소파에 묻었다. 수사슴은 따뜻한 태양을 등지고 백조의 잠을 잤다. 나는 A의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걸 느꼈다. 그녀의 숨길 수 없는 고독이 낡은 피아노 속으로, 화초들의 겸손하고 싱그러운 초록 속으로 스며드는 걸 보았다. 나는 검은 잠을 자야겠다. 그가 하얀 잠을 잘 수 있도록. 나는 라넌큘러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라넌큘러스의 꽃잎은 더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죽어가는 꽃이 피어나는 꽃보다 우아하구나. 시들기 전에 꽃잎 한 장을 먹어둔 게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UnsplashMarkus Spi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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