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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01. 2024

젖어들다

소설


 베란다 얇은 벽 너머에선 며칠 전부터 기침 소리가 들렸다. 부쩍 쌀쌀해진 저녁 날씨에 감기라도 걸린 것일까. 하고 얼굴 모르는 옆집 사람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걸 걱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걱정하는 체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낮, 베란다 쪽 창문을 열고 식탁 앞에 앉아서 턱을 괴고 ‘오늘은 무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베란다 벽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기침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배가 고파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먹는 동안에도 기침 소리는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 앓는 소리가 배음이 되니 나의 상념도 앓는 쪽으로만 흘러갔고. 나는 나트륨이 다량 함유된 라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서 저놈의 기침 언제 그치나 퉁명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나의 책상 겸 식탁으로 돌아와, 어제 읽다 만 A 시인의 시집을 펼쳤다. 그녀의 언어는 헤어짐을 앞둔 연인과 같이 보는 저녁 하늘의 찬연한 보랏빛처럼 서글프게 물들어 왔다. 그러나 그녀의 언어는 감성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꿋꿋한 부외자의 언어. 어떤 초연한 상냥함. 살아가고자 하는 힘이 느껴졌다. 내가 그녀의 시에 다시 막 빠져들어 갈 때쯤, 기침은 시작되었다.


 ‘이대론 안 된다.’


 나는 집을 나왔다. 옆집 사람의 기침 소리는 데시벨로 따지면 심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이는 소음이었다. 마음이 쓰이는 소음을 지척에 두고는 독서를 할 수 없었다. 구두 소리와 동행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엷게 깔리긴 했지만 흐린 하늘은 아니었다. 엷은 구름 뒤에서 느긋한 얼굴로 빛나는 태양은 온화했다. 나는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출입하는 부외자의 존재를 신경 쓰는 예민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홍차 맛이 진한 밀크티와 조각 케이크를 한 개 주문했고, 기적적으로 발견한 2인용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생초콜릿이 얹어진 부드러운 케이크를 푹푹 찍어 먹으면서, 집에서 읽지 못한 시집을 읽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건 엄청난 데시벨 때문일까, 아니면 달라진 장소가 제공하는 아늑함 때문일까. 나는 시집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픽업대에서 음료와 빵을 가져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구경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경을 쓴, 나와 같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자본주의화 된 목소리로 손님들을 호명했다. 귀에 부드럽게 감겨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푸른 눈을 가진 원숭이를 조련하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전설 속 유랑극단의 총아를 연기할 때 유용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자본주의화 된 목소리의 부드러움이 어김없이 존재했으나 그 부드러움으로도 가릴 수 없는 개성이, 나의 귀를 두드렸다. 옆자리의 아주머니들은 웃음 파도를 만들며 수다를 떨었다. 그 모든 소리가 나와 불화한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나에겐 소음을 차단할 수단이 없었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시집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여전히 집중은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독서는 뒷전이 되었다. 나는 데시벨의 파도에 떠내려가는 생각들을 붙잡는 대신 손을 놀렸다.


 시집 귀퉁이는 상상의 그림들로 채워져 갔다. 나는 십자가 모양으로 양팔을 벌리고 누운 사람을 그렸다. 당신.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다른 곳에는 담장에 핀 능소화를 그렸다. 또 다른 곳에는 푸른 눈을 가진 원숭이를 어깨에 매단, 주근깨가 많은 소년을 그렸다. 소년의 얼굴은 장난기가 많아 보였다. 시집 귀퉁이를 이런저런 의미 없는 낙서들로 채워가는 사이, 창밖의 하늘이 서서히 저물었다. 카페의 데시벨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이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마 읽지 못한 시집을 다시 가방 속에 넣고, 컵과 케이크 그릇을 담은 쟁반을 반납한 다음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푸른 하늘에선 푸름이, 쓸쓸한 가을바람에선 쓸쓸함이 와서 스며들었다. 푸름은 쓸쓸한 색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장난기 많은 소년의 어깨에 매달린 어린 원숭이의 눈은 쓸쓸한 눈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피부에 가을 추위가 스며들었다.


 밑단이 조금 늘어난 검정색 바지에 가을꽃 무늬 블라우스 차림으로, 한쪽 어깨엔 가방을 메고 머리는 대충 흘러내리도록 묶은 나의 모습은, 상상을 좋아하는 저녁 행인 같았다. 꼭 저녁에만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상상가 지망생. 바람 부는 곳에 사는 사람. 나는 적당히 헝클어진 나의 모습을 괜히 뿌듯하게 여기며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집의 불을 켜고 식탁 앞에 앉았을 때, 스며오는 앓는 소리. 조용하게 앓는 소리. 나는 잠자코 귀를 기울여보았다. 소리는 베란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용하게 앓는 소리는 이내 그치더니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카페에 나가 케이크를 먹고 시집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옆집 사람은 내내 홀로 견디고 있었구나. 묘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기침 소리가 나에 대한 타박처럼 들려왔다.

     

 괴로운 듯 즐거운 듯 우는 듯 웃는 듯한 그의 투병 소리가 이제야 가슴에 스며들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서 그의 생생한 삶의 소리를 들었다. 맛있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생각에 든든했던 마음도 이제는 왠지 쓸쓸해졌다. 나는 그의 아픔을 들어주기 싫어 집을 나가버린 나 자신이 왠지 싫었다. 오만한 한 끼 대신 낮에 먹은 라면이나 다시 끓여 먹자고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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