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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Sep 29. 2024

멀리서 점점 가까이

소설


 밤의 선율은 단조롭고, 부드럽고, 애상적이었다. 지친 사람의 잔잔한 미소에서 풍겨나는 분위기를 시각화한 것만 같은 아늑한 조명이, 벽면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비추었다. 휘엉키는 낮구름과 도도히 타오르는 영혼처럼 보이는 초록의 삼나무의 세계에 밤의 불빛이 스며들었다. 그림이 잠이 드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대지의 휘파람과 같은 바람에 은은히 흔들리는 밀밭도, 뻗어 올라가는 삼나무도, 담배연기 같은 구름들도 저마다의 고요 속으로 침전했다.


 그들은 잠을 자면서도 휘엉키고, 타오르고,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아늑한 잠의 세계로 빠지기 전 일종의 우아한 통과의례처럼 찾아오는 고통이, 오늘은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세상이란 거창한 상대와의 불화가 원인이라 하는 의사도 있고, 그저 고독이 이유라는 친구도 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느끼지만, 딱히 이 고통에 정체의 낙인을 찍고 싶진 않다. 어차피 고통은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더 이상 고통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쓸쓸한 듯 온화한 선율의 끝자락에서 실수인 듯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 것 같았다. 지금 잠이 들면 내일 아침 건강한 피부로 일어날 수 있겠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건 사유의 막을 닫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사유의 안개 속을 헤매는 게 좋았다. 살아있음의 적당한 피로감을 느끼는 게 좋았다. 피곤한 선율은 기억을 더듬어갔다.


 내가 열다섯인가 열여섯이었을 때. 서울 근교의 작은 집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밤은 자주 푸르렀고, 풀벌레 울음만이 나의 적적함을 달래줬다. 아빠는 몇 달마다 한 번씩 지치고 다정한 낯으로 집을 찾아왔고, 엄마는 나와 함께 살았지만 낮에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기형도의 시에 나오는 화자처럼 방에서 숙제를 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동네에서 솜씨가 좋다고 소문난 수선집이 엄마의 수선집이란 사실은 나를 우쭐하게 했지만, 정말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일 나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밤은 길었고, 숙제를 다해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지루함을 넘어선 초조함이 되곤 했다. 나는 별의별 걱정을 다했다. 엄마가 일을 그만두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일을 그만두면 안 되냐고 말한 적은 없었다. 나는 밤마다 엄마의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졸음을 참았다. 저 멀리서부터 지친 발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나는 안심을 했다. 엄마가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자는 척을 하다가, 방금 깬 것처럼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자지 않았다는 걸 알고도 속아주었다.


 달이 밝은 날엔 창문을 열고, 내리쏟아지는 달빛에 정수리를 함빡 적시면서 엄마가 사 온 뜨끈한 통닭을 나눠먹었다. 엄마와 나는 통닭을 먹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존재에 무언의 위안과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을 제멋대로 달빛의 날들이란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의 따뜻한 감정과 슬픈 안도감이 마음속에 아직도 생생히 어리어 있다. 내가 그이를 만난 건, 엄마가 먼 곳에 계시는 할머니의 입원 문제로 며칠간 집을 비운 초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너 달에 한 번은 얼굴을 비추던 아빠는 아홉 달째 소식이 없었고, 앞뜰의 모과나무는 이유도 없이 시들푸들 앓고 있었다. 슬픔이란 단어를  몰랐으나 내 안에는 늘 안개 같은 것이, 돌담에 기대앉은 조용한 거지소녀의 노래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나는 때로 영혼의 적요함에 몸서리를 쳤다. 잠이 들지 않는 새벽에는 불빛 아래서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쓰곤 했다.


 나는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초가을의 쓸쓸함이 몸에 스며들어 눈이 떠졌다. 벽걸이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즈음이었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나는 익숙한 적요함에 휩싸였고, 머리맡에 놓인 수신인 없는 편지들을 손 안 가득 쥐어보아도 공허한 마음은 어쩔 길 없었다. 나는 일어났다. 신발끈을 묶고 집을 나왔다. 영롱한 울음 우는 풀밭을 한참 바라보다가 짙은 풀내음에 코가 마비될 때쯤 몸을 돌려, 집 뒤편의 작은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시풀에 쓸려 발목에 생채기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땀을 흘리면서 묵언의 산행을 계속했다. 그 길 끝에서 어떤 신비를 만나게 될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오르고 올랐다. 그이의 허름한 산집을 발견한 건 야산의 중턱에 겨우 도착했을 때였고, 구름 사이로 내려온 달빛이 지붕을 비추고 있었다. 범죄자의 집이려나!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고독의 세월에 지쳐 인간의 집을 짓고 인간을 기다리는 신수의 집? 그것도 아니라면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의 집? 나는 구슬 꿰듯 추측에 추측을 이으며 성큼성큼 산집에 다가갔다.


 초라한 외양의 판잣집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자 보드라운 먼지 냄새가 났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주인이 미닫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이는 회색 터틀넥 스웨터에 구겨진 감색 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나의 갑작스러운 침입이 놀랍지도 않은지, 마치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맞이하듯 말없이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은 고요했고, 얼굴 중앙에 자리한 코는 오뚝한 편이었으며 입이 다물어진 모양은 신기하게도 그의 견고한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훗날 나는 그의 입술이 다물어진 모양에서 약간의 관능을 감지하기도 했으나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비추던 푸르른 달빛 때문인지 그의 인상은 차가울 만큼 견고해 보였고, 동시에 맑아 보였다. 나는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잊고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밤새가 날아든 줄 알았군. 무슨 볼일이라도?"

 "아니요. 볼은 없어요. 그냥 발걸음이 이쪽으로."

 "날아든 거 맞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요한 물가에 돛배 띄우듯 미소를 띄우는 것이었다. 신수 같지는 않았다. 범죄자 같지도 않았다. 당연히 여자는 아니었고. 나는 깊은 밤 달빛의 서늘한 아름다움에 홀린 망망대해의 선원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산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었어. 너도 조심해. 하고 그이는 덤덤히 말하면서 자신의 한쪽 소매를 걷어올렸는데, 정말 산모기에게 물어뜯긴 자국이 군데군데 열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괴로울 것 같은데도, 그는 그저 담담했다. 나는 이 밤중에 마음이 답답해서 야산을 오르다가 홀린 듯이 허름한 산집에 들어가 거기서 처음 본 남성의 팔에 수놓인 모기 물린 자국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의 상황이, 꿈보다 더 꿈 같아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의 기억 속에 엄연히 남아있는 초가을 허름한 산집 속의 그이는 꿈일까. 꿈보다 더 꿈같은 현실일까. 나는 그날 그이의 권유에 따라 그이의 뒤축이 꺾인 신발 옆에 나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미닫이 문 안쪽으로 들어간 것과 거기서 차를 마신 것과 또 언젠가 그에게 모기 물린 데 바르는 약을 사다 준 것을 기억한다. 백차의 쓸쓸한 향기처럼 퍼지는 기억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나는 그를 만나러 다녔다. 오로지 밤에만. 오로지 백차를 우리는 흰 주전자처럼 깨끗한 달덩이가 뜬 밤에만. 어떤 날은 손전등 없이도 달빛에만 의지한 채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이는 내가 밤에 찾아오면 쓸쓸한 낮에 그린 그림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작품은, 과일 몇 개와 캔버스와 식물이 자라는 화분들이 있는 화실 그림과 산중턱에서 바라보는 노을 풍경을 담은 그림, 폭포 소리가 들려오는 그림, 주인 없는 묘지 그림……. 이밖에도 꽤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그가 어느 눈 쌓인 밤에 보여준 매화꽃 그림이었다. 얼기설기 뻗은 가는 나뭇가지에 소담히 피어난 붉은 매화꽃. 바람결에 몇 개 꽃잎 순순히 떨어지는 그 묘하게 씁쓸한 그림. 내가 보려고 그린 그림인데, 너의 눈엔 무엇이 보이지. 그가 묻길래 나는 쇠락이 보인다고 말했다. 살아있는 쇠락. 조용하고 관능적인 쇠락. 나는 그 그림을 애착했었다.


 "왜 이런 산중에 들어와 살고 계세요."

 "비극적인 인생사에 휘말린 여자가 산중을 헤매고 있으면, 데려와 잠자릴 내어주려고."

 "불순한 목적인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그러면서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나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의 눈빛은 고요함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내가 그이를 바라보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열다섯인가 열여섯이었고, 그는 서른이 넘어 보였다. 구체적인 나이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보다 젊었을지도 모른다. 행동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양해. 너는 내가 불순한 욕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저 뼈의 단단함으로부터 나의 공허한 마음을 위로받고 있다고 생각해 줄 수도 있겠지. 맥박이 조금 빠르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설핏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나는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감추듯이 감싸 쥐고는 그에게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힘든 여인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내어준 다음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서른이 넘어 보이는 허름한 사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보내줘야겠지,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남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물론 나는 그와 달빛 쏟아지는 침상을 불순한 행복으로 더럽히진 않았지만 말이다. 때로 그의 어깨에 기대 은근한 한숨을 내쉬었을 뿐.


 어느 겨울밤, 그는 소맷부리가 넓은 밤하늘빛 두루마기를 입고 나를 맞이했다. 평소의 허름한 옷이 아닌, 윤기 나는 밤하늘로 물을 들인 듯한 한복 빼입은 그 달라 보였다. 흰 눈이 소조히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나는 그에게 이끌려 다시금 밀애의 문지방을 넘었고, 미닫이문 안쪽 쓸쓸한 방에서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고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제, 작별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내게 작고 흰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술잔을 받아들었다. 작고 흰 술잔 안에는 눈(雪)이, 밖에서 내리는 그 흰 눈이 소담히 쌓여 있었다. 잔의 반 정도를 채우는 눈은 이상스럽게 아름다워 잠시 나의 넋을 풀어놓았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칼은 평소와 다름없이 헝클여져 있는 그이는 나를 보며 담담히 미소 짓더니 술잔에 맑은 것을 따라주었다. 눈물처럼 맑은 것이 향은 어찌나 독한지 나는 순간 아찔해졌다. 영원할 것 같던 소담한 눈무덤은 독한 술에 섞여 흔적 없이 녹아버렸고, 나는 그걸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잔에도 천천히 술을 따랐다. 휘오오 휘오오 바람이 불었다.


 "마셔."

 "나는 술을 마신 적이 없는데요."

 "어차피 나중에 마시게 될 거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숨에 술을 넘겼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건 술이 아니라 불길이었다. 나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홧홧한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끝까지 입술을 떼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내리니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이가 보였다. 짙푸른 어둠으로 물을 들인 것 같은 그의 옷에서 바늘구멍 크기의 별빛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간의 환각이었던 모양이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매끄러운 술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아픈데요. 하고 읊조렸다. 그러자 그는, 원래 작별은 그런 거야, 하고 나직이 대답하고는 눈과 술이 섞인 작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느른히 내쉬어지는 그이의 숨결에선 무거운 술냄새가 풍겼다. 그는 내게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그의 잔에 술을 따르고 싶었으나 팔이 너무 무거웠다. 몸 전체가 무거웠다. 그는 쪼르륵 술잔을 채운 다음 내게 건배를 청했고, 나는 그제야 가까스로 팔을 움직여 술잔을 부딪혔다. 그리곤 단숨에 들이켰다. 또 한 번 불길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그의 앞에서 결코 쓰러지고 싶지만은 않아, 꿋꿋이 곧은 자세로 앉아 무모한 대작을 이어갔다. 나는 그이를 이길 수가 없었고, 결국엔 핑글핑글 도는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소리 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나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목구멍이 지독히도 아팠다. 시야가 흐려졌.


 나는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이의 근사한 옷의 짙은 쪽빛을 바라보았다. 갈수록 시야가 흐려지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며 술을 마시는 그의 얼굴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제정신 아닌 채로 생각했다.


 언젠가는 꼭 이겨야지. 그때는 당신이 내 앞에서 쓰러져야 할 거야.


 나의 흐려져가는 모습을 고요히 응시하며 술을 마시는 그이의 몸 뒤로, 붉게 지는 매화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그린 매화꽃 그림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그이의 넓은 소맷부리의 운치와 소조히 떨어지는 꽃잎의 조화는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매화꽃 지는 밤에 의식을 잃어가는 희생양숨결이 완전히 끊어지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독취(禿鷲). 야차들의 몸종. 억 겹의 죄를 짊어진 영혼을 끌고 나아가는 고독한 존재. 그때의 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그에게 천근 같은 팔을 힘겹게 뻗었으나 닿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만약 당신이 부서진 달빛 위에 쓰러져 누워 내게 손을 뻗었다면, 나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었을 텐데. 나는 달빛의 파편이 피부 깊숙이 박혀 들어오는 이상한 통증을 느끼며 슬쩍 몸부림을 쳤다. 괴로운 순간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짙은 쪽빛 밤하늘로 끝없이 추락했다. 미몽을 흩뜨리듯이 손을 휘저었을 때, 내 손에 잡혀 온 건 당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과 낯을 가리게 됐다. 오늘날 나의 성격은, 그이와의 밤이 남긴 화상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나는 천정을 향해 누워 밤의 피아노가락을 듣는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선율은 가슴의 추한 영상들을 포근히 감싸 안아준다. 나는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께에 두 손을 포개고, 내 몸의 어디가 아픈가 느껴본다. 낮에는 나의 몸과 차분히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허리가 조금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린다. 나는 벽면에 걸려 있는 고흐의 그림 속에서 묵묵히 타오르는 진초록의 삼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불꽃이 타닥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목감기를 예감할 때 그러듯, 나는 입안에서 침을 모아 조심히 삼켜본다. 아프다. 그날 밤, 그이의 안방에서 반은 자의로 반은 타의로 받아마신 독한 술에 화상을 입은 목구멍이 다시 아프다. 그날 밤 나의 식도를 타고 흘러내린 건 뜨거운 죽음이다. 사랑만큼 뜨거운 죽음. 죽음을 삼키건, 사랑을 삼키건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불길이 지나간 듯 까맣게 타버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닫힌 눈꺼풀 안쪽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 어둠 속에서 나의 영혼은 고흐의 삼나무처럼 춤을 춘다. 근교의 옛집을 떠나 서울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나는 매일 밤 아늑한 잠을 잔다. 한때는 불면증이 있었지만, 자기 전에 작게 음악을 듣기 시작한 뒤로는 다시 아늑한 잠을 회복했다. 나는 깨느른한 숨을 내쉬면서 의식의 저편으로 조금씩 빠져들어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본능적으로 나는 그것이 산바람이라고 느낀다. 도시의 바람과는 다른, 시원의 장소에서 불어오는 듯한 서늘한 산바람이 피부를 스치자 괜스레 눈물이 차오른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밤의 가는 가락이 꿈실이 되어 꿈을 짜내고 있는 건가. 그때 귓속에 나직한 목소리 흘러들어온다. 오랜만이군. 그 음성에 손끝이 저릿하다. 대답을 하고 싶지만 목이 아파서 관둔다. 늙은 아저씨가 된 그이의 얼굴을 확인하면 실망할 것 같아 그냥 눈을 감은 채로 돌아누우니, 그이는 조용히 다가와 소맷부리를 쥐어준다. 나는 ,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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