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달이 붉은 구름에 가려지자 밤이 왔다. 어둠 속에서 천사상이 우는 밤. 너는 어둠 속에서 밤의 포식자처럼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켜 마침내 부활했다. 구둣발이 바닥을 디뎠다. 지옥이란 손님을 기다리는 응접실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달빛이 고였다. 천사상의 눈물처럼. 너의 무거운 구둣발이 바닥을 디딜 때마다, 언 침묵과 같은 달빛에 금이 갔다. 너는 태연하고도 진중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사상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하얀 처녀상은 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어깨를 잡혔을 때도, 침착을 유지하는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반나체의 처녀상은 너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너는 비릿한 눈빛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처녀상의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는, 당신은 불청객이야, 하고 나지막이 속삭이더니 그녀를 선반에서 밀었다. 그녀의 몸이 느리게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차가운 대리석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때 영혼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흡사 예민하고 투명한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같은. 너는 조각난 천사의 파편을 구둣발로 지르밟으며 대리석 방의 한 가운데 죽음처럼, 고요처럼 놓여 있는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가을의 서정이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검은 피아노 앞에 앉은 너는, 잠시 지옥님의 등줄기를 어루만지듯이 흑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엄숙한 표정의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느끼는 걸, 느끼는 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면서, 너는 열 개의 손가락으로 너의 마음을 최대한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너의 차가운 이마에 열정의 땀방울이 맺히었고, 가을바람도 그것을 식히지 못했다. 너는 붉은 사랑을 표현했다. 네가 죽은 이유도 붉은 사랑 때문이었고, 다시 살아난 이유도 붉은 사랑 때문이었다. 엄숙한 화마 속의 절대자에 대한 간구와 죽은 천사에 대한 고요한 애욕이 충돌하는 클라이맥스에서, 너는, 먼 우주의 두 개의 행성이 충돌 폭발하는 장엄한 비극을 감지했다. 너는 휩쓸고, 놓아주고, 위협하고, 애원하듯 간절히 다가가며 연주의 완성에 도달했다.
눈을 감은 너의 손등 위로, 장미의 가시처럼 날카로운 누군가의 손톱이 박혔다. 손톱이 박힌 곳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계속하세요. 누군가 너의 귓가에 그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익어서 물러 터진 선악과의 풍염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아직 너의 안에 어떤 언어가 잠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너는, 계속하라는 누군가의 아득한 음성만을 따라, 열 개의 손끝이 다 짓무르도록 처절하게 엄숙하게 너만의 연주를 이어갔다. 들짐승의 정념을 토해냈다. 정신병원에 갇힌 사드의 냉엄한 눈빛을 갈아 마셨다. 그리고 토해냈다. 눈꺼풀을 닫아 세상의 빛을 차단한 네가 너의 본질에, 사랑받을 수 없는 너의 언어에 절절하게 접근해가는 동안에, 미지의 방문객은 너의 검은 옷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그리고 가시관의 가시처럼 잔인한 손톱을 너의 피 흘리는 손등에 박아넣고는 힘줄 돋은 팔을 천천히 긁어 올라갔다. 진혼곡을 연주해주시겠어요. 저를 위한. 절대자의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여오는 그것이었다.
너는 그 순간, 반나체 천사의 담담한 눈빛을 떠올렸다. 눈물이 고인 천사의 담담한 얼굴이 너의 웃음을 자아냈다. 너는 고개를 흔들면서 웃음을 웃었다. 너의 눈꼬리엔 눈물이 어리어 있었다. 너의 팔뚝에선 타락한 짐승의 피처럼 검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절정으로 치달아가는 너의 연주에 음악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타락했다고, 너는 생각했다. 네가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미친 듯이 연주를 부수어가자, 너의 팔목을 잡고 있던 안개 같은 손길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너의 차가운 뺨에 와닿던 그것의 숨결이 사라지기 직전, 그것은 너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진혼곡을 연주해주시겠어요? 저를 위한. 너는 조용히 눈을 떴다. 형형한 눈빛으로 너의 멈출 수 없는 손길에 의해 허물어지고 부수어지고 떨어지는 진혼의 음악을 응시하면서, 쓸쓸한 환희를 느꼈다. 장렬한 파괴. 너는 마지막 내리침으로 음악의 골통을 부쉈다. 너는 굳은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털썩 주저앉아 쓰러지는 사람처럼 피아노는 가련히 무너졌다. 먼지가 일었다.
너는 파괴된 피아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느릿하게 숨을 골랐다. 왼팔에서 검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너에게선 흐트러진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슬픈 애욕이여. 너를 지옥으로 이끄소서. 구원의 빛이 온화하게 고인 지옥의 침상으로 너를 인도하소서. 나의 언어가 너를 구해낼 때까지, 너에게 쓸쓸한 안면을 허락하소서. 장미꽃잎처럼 부드러운 꿈을. 너는 피가 흐르지 않는 손을 천천히 들어, 뺨을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천천히 훔친다. 존재의 깊은 어둠 속에서 솟아 나온 눈물의 뜨거움. 원망하듯, 만감이 교차하듯, 고통스러운 듯 위를 치어다보는 너의 눈빛의 결연함. 너는 눈물길이 말라붙은 얼굴로 천천히 몸을 돌려, 너를 위해 준비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간다. 견고한 구둣발 소리에 언 침묵 같은 내 가슴에 금이 간다. 그렇게 생긴 틈을 찢고, 본질의 언어가 절규에 가까운 탄생의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너는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혀 사라진다.
금 간 나의 가슴에서, 하늘에 가닿은 존재들의 합창 소리가 새어 나간다. 장엄하고 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