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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Sep 19. 2024

마음이 있는 곳

소설


 고서점 안쪽에 숨겨진 방문을 열자, 당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맞이한다. 당신의 입가에 반가움의 미소가 번져가는 걸 나는 본다. 나는 신발을 벗고 당신의 낡은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오래된 텔레비전과 모서리가 벗겨진 낡은 탁자, 녹슨 주전자와 때 묻은 셔츠가 고단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나는 그것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면서 인사를 나눈다. 나 돌아왔어, 하고 말하듯이. 귀환을 환영하는 능숙한 의례의 손길로, 당신은 작은 화로에 불을 지피고 찻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당신에게 돌아옴을 환영받은 사람들은 누굴까.


 왜 그들은, 지금 당신 곁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고 당신의 귀에 들리게끔 나지막이 중얼거리면, 당신은 약간의 서글픔과 부드러운 애정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그 눈빛 속에는, 너는 언제까지 이곳에 돌아올 건가? 하는 물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초연한 당신은 내게 그런 걸 묻지 않을 것이다. 앉으라고 권하는 당신의 말에 순순히 응, 하고 대답하곤, 방 한가운데 길게 놓인 낡은 나무탁자 앞에 앉았다. 그것은 이 고서점을 운영하였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당신의 인심 좋은 큰아버지가 손수 만든 나무탁자였다. 나는 나무탁자의 선명한 나뭇결 무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작은 찻잔 두 개에 주전자물을 따르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는 따스했다. 향긋한 찻내가 목구멍으로 따스하게 흘러들자, 나는 비로소 내가 돌아올 곳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큰아버지의 유품인 낡은 나무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의 맞은편에 앉더니, 여자의 손수건처럼 하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차가 참 맛있다고 말했다. 당신은 은은한 입꼬리를 당겨 약간의 미소를 만들며 당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나는 천천히 차를 마시는 당신을 바라보면서, 친지들의 작은 불화로 인해 미친 여자의 머리털처럼 헝클여져버린 추석 연휴에 대해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고, 당신은 말없이 나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나는 나의 말을 차분히 경청해주는 당신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찻잔을 금방 비웠다. 당신은 한 잔 더 마시겠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어디 안 갔습니까? 내가 물었다.


 당신은 반쯤 남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큰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홀로 절을 올리고 왔다고 말했다. 독신으로 지냈던 당신의 큰아버지는 당신을 자식처럼 생각했고, 단명한 당신의 부모 대신 당신에게 부모 노릇을 해주었다. 큰아버지가 친한 친구의 아버지에게서 넘겨받은 고서점을, 이제 당신이 물려받아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가 비 오는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당신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당신은 지나간 슬픔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방 어디에도 큰아버지의 사진이 담긴 액자는 찾아볼 수 없었고, 당신은 장례식장에서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을 뿐이라고 언젠가 내게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당신의 그런 담담함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큰아버지의 산소에 절을 올리고 또 무얼 했나요."

 "주변을 거닐었지. 냇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물새 한 마리가 날아드는 거야."

 "물새 한 마리가요?"

 "응.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든 꽃을 물고 있더라고. 나는 그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첩에다 그리기 시작했어."


 나는 물소리 흐르는 냇가 앞에 앉아서 혼자 수첩 위에 그림을 그리는 당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나는 그 그림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은 조금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 수첩을 두고 내려서 그때 그린 그림은 없어졌다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찻잔에 남은 연못빛의 차를 쭉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랍장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왔다. 이끼가 낀 냇가 바위에 올라선, 호리호리한 잿빛 물새 한 마리가 죽은 꽃줄기를 부리에 물고 가을 햇빛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시든 꽃을 애착하는 작은 물새의 무구함이 묘하게 쓸쓸하다고 느껴지는 건, 당신의 무심하고도 부드러운 붓질 때문일까. 가을의 기묘, 제목이야. 라고 읊조리듯이 말하는 당신의 목소리에서, 이 그림에 대한 자신감과 호롱불처럼 그윽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수채화의 무심하고도 아련한 색감 속에서 냇가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해가 기울고 저녁의 푸른빛이 밀려왔다. 내가 있는 동안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오늘은 연휴의 마지막 날이니 다들 더 즐거운 곳에 있을 것이었다. 날이 기울면서 방 안이 어두워지자 당신의 존재가 호롱불처럼 그윽해지는 게 조금은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불을 켜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윽한 당신을 호롱불 삼아 어느 먼 나라의 옛 설화집을 읽는 저녁. 밖에선 이따금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앵두나무 서점>이라는, 다소 고서점답지 않은(?) 이름을 가진 고서점이 신기한 듯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연인도 있었지만, 문간을 넘어 들어오는 발은 끝내 없었다. 당신은 한숨 자고 일어난 뒤, 서랍장에 등을 기댄 채 부스스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코끝으로 매캐한 담배 냄새가 스쳤다. 당신은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아직 여기 있지?"

 "아. 깨는 거 보려고요."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


 "깨는 걸 보려고 아직까지 있었다고."

 "네."

 "내가 죽었어. 꿈속에서. 이유도 없었어."

 "큰아버지를 뵌 뒤라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럴까.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꿈을 꾸었어. 그런데, 뒤숭숭하거나 식은땀이 나진 않아."


 그럼 어떤 기분인데요? 나는 담배 연기를 빼기 위해 미닫이문을 아주 조금만 열면서 나지막이 물었다. 한 줄기 가는 빛이 새어 들어오자, 당신의 정체를 알 수 없던 환함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녁잠 같은 아련한 밀애를 방해하는, 한 줄기의 현실이 새어 들어오자 나의 마음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당신을 향한 위험스러운 감정도 자연히 흩어지고 없었다. 당신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조금 외로워, 하고 대답했다. 당신은 연기를 후 내뿜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잔잔한 쓸쓸한 미소가 걸린 얼굴로, 잠깐 나가서 걷자, 라고 말했고, 나는 보고 있던 옛 설화집을 덮으면서 그러자고 대답했다. 나는 아주 조금 열려 있던 미닫이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아늑한 환한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은 본능적으로 가늘어졌다. 당신 쪽을 불현듯 돌아보니, 당신은 손바닥을 펼쳐 빛을 가린 채 얇은 눈꺼풀을 하염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무안한 얼굴로 씩 웃으면서 손을 내렸다. 나보다 눈이 약한 것 같았다.


 "왜 서점 이름이 앵두나무 서점인 겁니까?"

 "나도 잘은 몰라. 큰아버지한테 이 서점을 넘겨준, 큰아버지의 친한 동무의 친부에게 사연이 있던 모양이야."

 "무슨 사연?"


 우리는 연휴의 마지막 밤, 덕수궁 돌담길을 산책하면서 밀담하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도 정확힌 모르는데, 그분의 약혼녀가 앵두나무를 좋아했다나봐. 그런데 그 여자가 결혼 전에 갑자기."

 "죽었군요?"

 "아―니. 애를 가졌어. 물론 그분의 아이였지.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 하여튼 애를 가졌어."

 "그분의 아이가 맞았죠?"

 "뭐, 그랬을걸. 딸이 태어났는데, 딸이 또 앵두나무를 좋아했대. 그래서 서점 이름도 앵두나무 서점으로 하게 된 거지."


 "지어낸 얘기 아니에요?" 하고 내가 당신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자, 당신은 간지럽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 나긋한 웃음소리가 되려 간지러워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지어낸 얘기야. 하고 당신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돌아보았다. 밤냄새가 났다. 당신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 입술이 포개어졌다. 당신의 입술은 거칠지만 따뜻했다. 당신이 타고난 외로움의 온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온화한 외로움에 의한 장난 같은 입맞춤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스러운 당신은 오늘밤 떠나야 하는 나를 붙잡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밤 떠나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당신을 기다림 속에 놓아두겠지. 당신은 나를 왜 기다려? 그러면 너는 왜 나를 찾아와? 나와 당신은 대답할 입술을 가지지 못했다. 책 보러 또 올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당신은 고개를 들어 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당신의 빈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느라 밤하늘에 별이 떴는지 볼 수 없었다.









사진: UnsplashSamuel Jeróni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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