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텁지근한 여름의 일몰과 같은 가을. 나는 새벽마다 가슴이 생명의 욕구로 가득 차오르는 걸 느끼며 글을 썼다. 아침 일찍 수업이 있는 날은 피곤했다. 하지만 쓰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불빛 나긋한 저녁이 되면 나는 낮의 자아를 벗었다. 사람들과 교유하는 상냥한 낮의 자아 대신 침묵을 즐기는 저녁의 자아를 입었다. 저녁의 자아는 상상하는 자아, 쓰는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자아였고, 나는 자아가 요구하는 일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내가 요즘 밤에 쓰는 습작들은 나를 전혀 닮지 않은, 어두운 글뿐이었다. 아니, 마냥 어두운 건 아니었다. 나는 사실 나의 글들이 어둡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나의 글이 죽음을 유혹하는 다정한 속삭임 같다며 싫어했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을 가져 그저 너라고 불려야 하는 너, 나의 글이 불온하다고 평가한 단 한 사람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났다기보단, 격렬하게 슬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영혼을 갈아 넣어서 낳은 창작물을 싫어한다. 그건 단순히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으로 절망적이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왜 싫어. 왜 나를 거부해. 하고 술기운을 빌려서 너에게 설움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너는 어딘가에 깊숙이 베인 상처를 달고 있는 손가락으로 나의 머리칼을 천천히 꼬면서, 설핏 웃음 지었다. 그리고는 다정하다고도 느껴진, 장난스러운 손길을 거두고 제 앞의 술잔을 비우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기 싫다고. 자신은 사실, 너무도 살고 싶다고. 나는 속이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네 눈동자에 비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진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너를 삶의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어두운 곳이 아니라 온화한 빛이 고인 자리로 인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가 그렇게 억울함을 토하자, 너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의 미적 의식은 죽음과 느리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핏빛으로 물든 저녁 하늘에 반응하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삶의 태도나 연애의 태도가 되지는 않았다. 미적 취향은 어디까지나 미적 취향일 뿐이었다. 나는 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는 너의 어떤 공격에도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너는 나를 보지 않고 느릿하게 술을 넘길 뿐이었다. 나는 조금 조바심이 났다. 나의 조바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너는 가벼워진 술잔을 내려놓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취한 목소리였다. “사랑, 내가 할 수 있을까? 사랑을. 내가.”
너는 다시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회색빛 연기가 누수 흔적이 얼룩진 천장을 향해 느릿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너의 귓가에 절절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거실을 비추던 희뿌연 달빛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어두웠다. 거부하지 마. 나를 사랑해. 나의 모든 걸 받아들여. 그러면 너의 모든 걸 가져줄 테니까. 나는 너의 귓가에 아이처럼 간절하게 속삭였다. 나의 메마른 콧속으로 너의 무거운 머스크향이 밀려들었다. 손등에 포개어지는 따스한 온기. 나는 눈물이 배어든 눈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그런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쳤다. 사랑해. 내가 말했다.
나는 나를 달래주는 너를 보면서 꿋꿋하게 울음을 참았다.
폐허는 죽음과 색기의 장소. 라고 조심스레 쓴 다음, 뻐근해진 가슴을 두드리면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던 어느 밤에, 나는 깨달았다. 너는 나의 미학적인 죽음이란 걸. 지금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기억할 수 없다. 어쩌면 발화와 동시에 뜻은 소멸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손목에 붉은 손수건을 묶은 너와 이별한 뒤, 나는 어느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Y 씨가 운영하는 시골 들판의 카페에서는 아니었고, 서울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Y 씨의 카페처럼 아담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었다. 앳된 인상의 남자 알바생과 여자 알바생이 함께 일하는 모습이 단란해 보였다. 손님이 나뿐이었기에, 나는 그들에게 허락을 구한 다음 구석에 버려진 듯 놓여 있는 낡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쓸쓸해 보이는 건반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의 창조가, 너를 괴롭게 한다면, 나는 펜을 꺾겠어. 아니, 그것만으론 안 돼. 손목을 꺾겠어. 너는 나를 평생 돌보면서 살아야 해. 나를 감당하면서 평생 살아야 해. 나는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담은 연주였다. 폐허의 눈빛은 창조의 손길을 낳았다. 그건 네가 연주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미 너와 이별한 뒤였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멜로디를 연주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내리치고, 쓰다듬고, 부드럽게 질주했다. 연주는 사그라들 듯이 끝났다. 여음이 흩어지고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나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굳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알바생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으로 여자 알바생의 어깨를 조심히 감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뛰쳐나왔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카페 구석에 버려진 듯이 방치된 낡은 피아노를 봐도 연주의 욕망을 느끼거나 하지 않는다. 이따금 피아노를 연주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다. 남의 연주를 감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울리는 연주는 오로지 너뿐이다. 새총에 맞은 새처럼 정상적이지 못한 날갯짓. 정상적이지 못한 처절한 날갯짓이 건반 위에 은근히 상처를 입히고, 나는 그걸 창조라 일컬었다. 더는 새벽마다 너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지 않지만, 너의 연주는 영원히 나의 마음에 스며들어 있다. 그 미완의 음표들.
학기가 시작되고 나는 쉴 틈 없이 바빴다. 어느 날, Y 씨에게 연락이 왔다. Y 씨는 잠깐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냐고 그랬다. 나는 나의 일상을 모두 멈추고 그에게로 날아갔다.
그는 오늘은 가게 문을 닫는다며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내년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 그이기에, 선뜻 집에 발을 들이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내 나의 마음을 깨닫고, 그의 초대를 수락했다. 푸른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낡은 집에서 카페의 주인은 살고 있었다. 살고 있다는 표현보다 버텨나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 안의 위생 상태는 좋지 못했다. 물건과 옷가지는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다. 퀴퀴한 곰팡내와 물감 냄새가 뒤섞여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Y 씨는 여전히 푸른 기가 비칠 만큼 창백한 얼굴에 초연한 눈빛과 소리 없는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질러진 옷가지를 대충 치우고 나를 앉히더니, 나무로 된 밥상에 밥과 찌개 따위를 내왔다.
그와 마주 앉은 채로 조용한 침묵 속에서 밥과 찌개를 먹었다. 다른 반찬은 없었다. 그는 차림이 부실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슬쩍 웃으면서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Y 씨와 내가 재회한 뒤 처음 나눈 대화였다. Y 씨가 끓인 애호박찌개는 맛있었다. 나는 찌개를 열심히 먹었다. 낡아 보이는 검은 니트에 처음 보는 안경을 걸쳐 쓴 그는 까다로운 교수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못 본 사이에 더 야윈 탓인지 나이가 들어 보였다. 면도를 깔끔하게 한 상태인데도, 얼굴의 폐허 같은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이따금 스치는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Y 씨는 내년에 결혼하면, 카페를 접고 미술 공부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약봉지가 보였다. 약봉지의 방치된 모양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는 다시 밥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Y 씨의 아내가 될 여자, 그러니까 그의 카페에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성실한 문학청년의 누나는 의사이며, 돈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Y 씨의 태도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평온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번뜩였으나, 그것이 무례한 생각이란 걸 느끼고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그가 타산적인 사람일 리가 없어. 나는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Y 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여기서 시선을 피하면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녀의 돈을 보고 결혼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죽을 만큼 당황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연 씨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그는 나지막이 웃었다. 나는 더 이상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카페를 접고 미술 공부에 매진하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죠. 내가 거절하니, 제발 자존심 부리지 말고 솔직해지라며 눈물을 흘린 것도 그녀였죠. 그녀는 내가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도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여자들은 왜, 가끔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겁니까? 하고 그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담담한 눈동자에 숨이 막혔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당신, 그 여자 사랑해? 하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나도 당신처럼 죽을병을 앓아야지만 내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따위 눈물, 그따위 눈물에 넘어간 거야, 지금? 아니면 죽기 전에 안고 잘 사람이 필요했어? 결혼은 왜 그리 서둘렀어?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기 전에,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뻗어서 그의 입가를 쓱 닦았다. 충동이었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는 아무하고나 만들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염치없이 결혼하는군요.”
그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을 사랑하는군요. 하고 말하자 그는, 그의 입가에서 방황하는 나의 손을 부드럽게 포개어 잡고, 손목 안쪽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댔다. 그건 키스가 아니었다. 포옹보다 건전한 어떤 것이었다. 나는 되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손목을 부드럽게 빼내고, 남은 밥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핏줄을 남기고 싶은 그의 마음이, 공허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 스러져 가는 운명으로서의 이기적인 결심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동정했다. 그는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나는 남겼다. 내 눈시울이 뜨거워질 줄 알았다면 그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떠올랐다. 그는 왜 나를 불렀을까. 고작 쉰 밥과 애호박찌개를 대접하려고? 아니면 이전보다 더 야윈 몸을 보여주려고? 아니면 자신의 결혼이 타산과 진심 사이에 놓인, 의연한 도피라는 걸 말해주려고? 그는 왜 나를 불렀을까. 나는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Y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늦여름 어느 꿈같은 날들에,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땐 어쩌면 그리 태평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그림을 가지러 안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얼마 뒤 그는 그림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벙찌고 말았다. 30호짜리 캔버스에 펼쳐진 강렬한 붉은 노을. 약시인 그가, 어떻게 이걸 그렸지. 나는 캔버스 속에서 타오르는 석양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그가 물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목이 메었다. 붉은 노을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이루지 못할 삶과 예술에 대한 끓어오르는 욕구가 스며든 이 그림에서 피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피로 그린 건가요? 내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낮게 웃었다. 선물로 줄게. 가져가. 반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훨씬 그의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친절을 거절했다.
“왜 싫니.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어요. 근데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는 약시가 있는 초연한 눈으로, 성난 듯이 타오르는 석양 그림을 바라보았다. 언덕엔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나나, 어린 시절의 너나, 어린 시절의 연 씨가 서 있으면 알맞을 것 같은 언덕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언덕은 쓸쓸해 보였다. 그림 한 점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있지. 하지만 너는 안 그럴 거야. 너는 가져도 돼. 그가 말했다. 나는 연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가지겠다고 대답했다. 그 망할 놈의 카페, 이제 치워버리니 후련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내가 알던 연 씨가 맞을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단풍이 떨어지네요. 나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 핏방울처럼 떨어지고 있지. 그가 대꾸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언덕의 단풍나무에서 붉은 단풍이 핏방울 떨어지듯 점점이 낙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