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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Aug 15. 2024

카페의 주인

소설


 연 씨!


 내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이다. 연은 그의 한 자뿐인 이름이었고, 한자는 알 수 없었다. 고즈넉한 시골 들녘에 자리한 작은 카페의 주인인 연 씨는 벽에서 낡은 그림을 떼다 말고,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다. 그의 조용한 얼굴에 조용한 미소가 스친다. 또 현 씨네. 이건 그의 목소리이다. 나의 이름은 외자가 아닌 두 글자로 ○현 씨라고 불리는 게 맞지만, 그는 앞의 한 글자를 빼버리고 본인의 이름과 같은 외자로 나를 부르는 걸 즐긴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도 없다. 처음엔 내가 반 쪼가리가 된 것도 같았지만 말이다.


 아직 손님들이 찾아오려면 한 시간 정도가 남은 오전이다. 손님들은 정오부터 한두 사람씩 종소리를 울리며 들어오기 시작해서 붉은 황혼이 지는 저녁이 되면 만석을 이룬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한 시간이 남은 오전의 화사한 카페 실내에는 나와 연 씨, 둘 뿐이다. 언제나 카페 안에 울려 퍼지는 고급지고 잔잔한 음악이 없으니, 실내는 조용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무슨 그림이냐고 묻는다. 자신이 옛날에 그린 풍경화라고 대답한다. 나는 화사한 햇빛을 등지고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본다. 그림은 10호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화이다. 비 내리는 봄날을 그린 그림인데, 얇은 빗줄기는 사선으로 내리고 있고, 고개 숙인 벚꽃 나무들에서 꽃잎이 흩날리듯이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영롱한 초록빛이 감도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차분하게 꽃잎들을 흩날리는 벚나무들을 제외하면 생명을 가진 것이 없다. 고요하다. 고요한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용한 선과 고요한 분위기로 죽은 척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은 살아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카페 주인은 내심 좋아하는 얼굴이다.


 내가 그림을 떼지 않는 게 어떻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조화가 안 돼요. 전체와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조화가 안 되는 그림은 개별적인 가치와는 별개로 인테리어 소품으로서 가치가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벽에 그림을 걸고 나에게 열 걸음 뒤로 가보라고 한다. 나는 열 걸음을 뒤로 간다. 그는 10호짜리 풍경화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다음 나에게 전체적인 조화를 보라고 지시한다. 그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지, 아무 말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본다면 오류라고까진 느껴지지 않을 텐데, 이미 편견이 생겨버린 탓인지 우울한 벽면에 걸린 한 점의 그림만이 눈에 지나치게 들어온다. 다른 것들을 잡아먹는 그림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조금 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상한 정도는 아니에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인지, 내가 바라보는 벽이 우울해 보이는 건 이 그림이 걸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연 씨는 그림을 떼어버린다.


 “아까운데. 전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눈이 피로하지 않은 그림이거든요. 뭔가 수려한 칭찬을 남기고 싶은데 미술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어서 튀어나온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요해서 좋아요. 나는 서두르지 않고 덧붙인다. 나를 현 씨라고 부르는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 주인은, 나의 멋없는 칭찬이 그래도 진실된 맛은 있었는지 엷은 미소를 띤 채, 자신은 눈이 약해서 강렬한 색채를 쓰지 못한다고 그런다. 나는 조금 놀란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내내 햇빛을 등지고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약시였다고 한다. 나는 약시라는 말이 초면이다. 나는 다시 그의 차분한 색감의 그림을 내려다본다. 낙화가 진다. 흙길 양쪽으로 늘어선 키가 낮고 굵은 벚나무들이 사선으로 내리는 봄비를 맞고 있다. “처음 그림을 그릴 땐 강렬한 색감에 이끌렸죠. 본능적으로. 하지만 강렬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너무나 빨리 눈이 피곤해졌고, 그게 싫었죠. 불타오르는 새벽 바닷가 그림을 너무 오래 바라보면 실명이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에 내가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 겪어본 적 없죠?”


 나는 이유 없이 너를 떠올린다.


 “글쎄, 아마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지난 일이잖아요? 나는 지금 연 씨의 그림이 좋아요.”


 연 씨는 대답이 없다. 나도 한때는 태양처럼 살고 싶었지요. 사랑도 태양처럼 하고 싶었고. 연 씨가 나직이 말한다. 그는 오늘도 후줄근한 차림에, 대충 집어넣은 와이셔츠는 뒤쪽이 삐져나와 있고, 단추는 귀찮아서 채우길 포기한 건지 위에서 세 번째까지만 잠기어 있고, 목 끝 단추와 그 밑 단추는 잠기지 않은 채 벌어져 있다. 셔츠 안에 런닝을 입고 있다. 무더운 여름 더위에 지친 발걸음으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카페 내부는 냉방이 무척 시원하고, 아무리 땀에 젖은 채로 들어와도 삼십 분이면 서늘하게 땀이 마른다. 연 씨는 추위를 잘 탄다. 아니, 겨울의 연 씨를 만난 적은 없으니 겨울 추위에는 또 강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에어컨 바람에는 취약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손님들을 생각해서 계속 시원한 상태를 유지한다. 남자치고는 좀 가늘게 느껴지는 목을 지나면, 삼 일 전쯤에 면도한 것 같은 턱이 나오고 그 위로 자리한 눈코입은 전부 조용하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입, 들릴 듯 말 듯한 숨기척이 느껴질 때 말고는 숨을 쉬는 건지 알 수 없는 코, 욕망하지 않는 눈.


 ‘사랑도 태양처럼 하고 싶었고―’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는 입. 그는 머리숱은 풍성한 편인데, 그 풍성한 머리숱이 감당이 안 되는지 남자들 쓰는 무스 같은 것으로 아무렇게나 모양을 잡아 놓아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 그렇다고 아예 모양이 안 되는 것은 아니고, 말하자면 어딘가 어설퍼 오히려 묘하게 비범한 인상을 풍기는 용모이다. 전체적으로 다 어설프다. 그러나 그의 아이 같은 미소를 보면, 그 어설픔이 지워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 지켜야 하는 무엇임을 느끼게 된다. 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똑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늦은 밤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차 밑에서 옹크리고 있는 길고양이와 눈이 딱 마주쳤을 때,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길고양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너의 모습에서 느껴지던 어떤 사랑스러움이 연 씨를 닮아있다. 너도 내가 평소의 긴장을 잃고, 무방비한 채로 서 있을 때 사랑스러움을 느꼈을까? 너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다만 너는, 늘 굶주린 듯한 눈빛이 빛나는 사람이었다.


 정오가 되고 손님이 하나둘씩 종소리를 울리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연 씨는 떼어낸 그림을 손님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카운터 안쪽에 대충 세워두고, 손님들의 주문을 받기 시작한다. 나는 일요일 저녁마다 온다는 문학청년이 자주 차지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시원한 커피를 마신다. 주문을 받는 연 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연 씨는 혼자 온 손님이 허락하면 삼십 분 정도 손님의 테이블에 동석해 자신의 말 상대로 삼는 아이 같은 취미가 있는데, 오늘은 혼자인 젊은 남자 손님도, 혼자인 젊은 여자 손님도 그냥 미소로만 맞는다. 오늘따라 혼자인 손님이 많은데 연 씨는 그들을 모두 흘려보낸다. 그는 왜 그럴까. 나는 나의 여름방학을 이런 연고 없는 시골구석에서 허비해도 되는 걸까. 여긴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나야 하는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연 씨가 바쁘게 커피를 내리고 빵을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창밖의 푸르른 여름 하늘을 올려다본다.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뭉게구름은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간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단 생각이 든다.


 나의 친구들은 모두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은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고 회사에 출근하는 친구도 있고 하다못해 유럽 여행을 떠난 친구도 있다. 나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나의 여름을 유유히 허비하고 있다. 나는 연 씨를 보기 위해서 서울을 버리고 여기에 온 것일까. 나의 치열한 날들을, 나의 건강한 교우관계를, 나의 착하신 부모님의 기대를, 나의 퇴색된 너를 버리고 연 씨를 선택한 것일까. 나를 압박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는 이곳에서 시원한 커피를 휘휘 젓고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연 씨는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에게 서양 미술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싶고, 내 손이 따라주기만 한다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아니 손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일단 그려보고 싶다. 나는 강렬한 색채를 써도 눈이 아프지 않으니까, 어쩌면 연 씨가 그리고 싶던 그림을 대신 그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처럼 나는 연 씨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인생이란 것이 저기 흘러가는 뭉게구름처럼 단조로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단조로운 것이 행복한 것일까.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림의 세계를 사랑하지만 결국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붓을 던져버리고 여러 공사장에서 호흡기를 망친 다음, 약해진 몸으로 시골로 내려와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연 씨나, 너와 헤어지고도 네가 이따금 궁금한 나나 단조로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러나 연 씨도, 그리고 나도 겉으로 보기엔 얼마나 평화로운지 가슴에 균열이 가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연 씨의 카페에서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은 대부분 무료하다. 평화로운 무료함이다. 너를 만나던 시절, 나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 분도 지루할 수가 없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타인의 마음에 폭풍을 만드는 사람. 타인을 괴롭게 하고, 안달 나게 하고, 목매게 하는 사람.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너와 있으면 속이 자주 얹혀 수없이 손가락을 따야 했고, 병난 것처럼 널뛰는 심장을 가라앉혀야 했고, 음식을 잘 넘기지 못했다. 화장실을 자주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건 네가 아니라, 너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였는지도 모른다. 푸른 새벽의 붉은 입술이 떠오른다.


 실제론 붉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데, 어두운 새벽의 푸른빛과 대조되어 실제보다 붉게 느껴진다. 그 입술은 꼭 죄를 속삭일 것 같다. 죄라는 글자를 좋아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입술은 생각보다 다정한 이야기를 잘한다. 일 년을 조금 못 채운 짧은 연애 동안, 나는 딱 한 번 운 적이 있다. 친구의 아늑한 집에서 친구에게 사과를 깎아주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다. 울면서 조용히 사과를 깎고 있으니 친구가 다가와 왜 그러냐고 묻는다. 왜 그러냐고 묻는 친구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는 입술을 짓이긴다. 그럴수록 울음은 자꾸 새어나간다. 나는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뒷날 친구가 말해주길 그 자식[너]이 너무 가엾다고 그랬단다. 그때는 네가 가여웠나 보다. 뭐든지 해주고 싶다고 그랬단다. 그러면서 나는 고집스럽게 칼을 들고 사과를 깎는다.


 조용히 들어주는 친구에게 못 할 짓인 걸 알면서도 응어리진 마음을 뱉는다. 나는 그 말을 한 것은 톡톡히 기억난다. 네가 가엾다고 말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말을 한 건 기억하고 있다.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나는 말한다. 그 친구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 친구가 나를 끌어안거나 등을 두드린다면 정말 싫을 것 같았다. 다행히 친구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곁에 있는 친구의 입속에 껍질 깎은 사과를 넣어준다. 친구는 먹는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얼음이 녹아서 싱겁게 느껴지는 맛이 참 너와는 달라서 안심이다. 나는 이제 너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연 씨와 함께 있는 게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연 씨는 다음 주말에 연 씨를 좋아하는 청년 손님의 주선으로, 청년 손님의 친누나와 만나게 된다. 내가 끝내 얼굴을 구경하지 못한, 일요일 저녁마다 방문한다는 문학청년이 바로 그이다. 도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막을 방법도, 이유도 없다. 연 씨처럼 마음이 맑고 착한 사람도 드무니, 그 청년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그 청년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자신의 친누나보다 연 씨를 더 좋아할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작고 한적한 카페의 주인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조용히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온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단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준다.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 준다. 상대가 요구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또 술술 꺼내지만, 그는 적당히 식은 커피잔을 들고 마시면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쪽에 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보기 드문 고상한 사람이다. 문학을 하는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는 나는 시에 능한 그 청년이 왜 연 씨를 좋아하고, 매형 자리에 그를 앉히려는 호기로운 야심을 품었는지 알 것 같다. 아마도 그 청년은 연 씨의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시가 조금 쉬워질 것이다.


 시가 향해야 하는, 청년의 앞으로의 길이 향해야 하는 방향이 조금은 뚜렷해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분명히, 그 똑똑한 청년은 자신의 친누나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보다도 연 씨를 오랜 대화 상대로 두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연 씨와 마주하고 있다 보면,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아도 어두운 마음에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비쳐온다. 연 씨는 어딘지 모르게 순수하다. 그 순수함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그 이상은 말할 수가 없다. 우리가―그러니까 나와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 일요일의 청년이―연 씨에게 깊은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발설되지 않을 때 순수하게 남을 수 있다. 발설하면, 아니 발설하려고 말을 고르면 필요치 않은 것, 불순한 것이 섞이고 만다. 그건 싫다. 연 씨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라, 가끔 늦은 밤에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달에 스치는 바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 단골손님의 제안(과 같은 부탁)이 조금 달콤하게 느껴진 것 같다. 연 씨는 운명에 몸을 맡기고 끌려가려 한다.


 나는 배신감은 느끼지 않는다. 연 씨는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가온 기회를 움켜쥐는 것뿐이다. 나는 연 씨에게 처음부터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늘어놓지 않았나. 연 씨는 나의 말을 전부 다 들어주지 않았나. 우리는 지금 이상의 사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느낌이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 둘 수 없는 연 씨를, 얼굴도 모르는 인간의 친누나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다. 끔찍이 싫다. 그 쓸데없이 부지런한 시의 청년이야 연 씨의 고상한 인간성을 느낀다지만, 그의 혈육이 연 씨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연 씨에게 서양 미술의 흐름에 대해 배우고, 그는 다루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강렬한 색채로 이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 내다보이는 절정의 황혼을 그릴 수 있도록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데. 아직 그에게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운명은 왜 이렇게 야속한지. 나는 운명이 나의 편을 들어주기를 속으로 기도하면서, 여름 바람에 살랑거리는 들녘의 맨드라미를 바라본다. 붉은 맨드라미. 봉선화도 붉다. 연 씨는 손님같이 앉아서 책을 읽는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다. 연 씨는 카운터를 비우고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 책을 펼쳐서 읽고 있다. 손님들은 손님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며 커피 맛을 음미하느라 카페의 주인이 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연 씨는 이곳이 자기가 운영하는 카페라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손님들에겐 완전히 무관심한 채 깨알 같은 글씨를 따라 묵묵히 시선을 옮긴다. 노란 카페 조명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글자의 하얀 바다 위에 검은 그림자를 만든다. 그는 책의 내용을 그저 스치기만 하는지, 주루룩 읽어내리고 순식간에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어떤 문장에, 어떤 문단에 오래 정박하는 법이 없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멈춤 없이 유려하게 읽어 나간다. 그의 거친 손끝에 스치는 페이지는 나뭇잎처럼 가벼워 보인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가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연 씨가, 그처럼 마음이 맑고 착한 사람이 죽어버리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그에게도 어두운 마음은 있겠지. 사납고 폭풍 같은 순간도 있겠지. 도끼를 휘두르고 싶은 마음도, 나쁜 짓을 하고 싶은 마음도 때로 생기겠지.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그런 격렬함과는 거리가 멀다. 타락할 수 없는 사람이다.


 타락할 수 없는 사람은 아름답다는 말보다도, 시적(詩的)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연 씨는 연하게 불어오는 시의 호흡 같은 사람이다.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사람이다. 나는 생각한다. 정말 죽어버릴 것 같다고 느껴지는 너는 오히려 죽지 않을 것이다. 달과 한숨을 나누고, 커피 향이 흐르는 카페에서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카페의 주인이야말로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죽음의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닐까. 당황하지도 않고, 억울해하지도 않고 술에 취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죽음을 뒤따라가는 건 아닐까. 휘청일 듯 중심을 잃지 않는, 그저 원하는 대로 흐느적거리는 듯한 그의 걸음걸이에 홀린, 밤눈이 밝은 길고양이가 그의 뒤를 조심조심 따라가는 풍경이 눈앞에 피어오른다. 길고양이의 눈은 어둠에 강하고, 탐스러운 호박빛이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에 오래 잠기는 것이 안 좋은 버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그만두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루가 가도 다시 하루가 온다. 그것은 연 씨가 매일 카페를 연다는 사실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해가 떨어지고, 종소리는 조용히 소란을 떨기 시작한다.









전편(?): 낙양


사진: 고흐, Farmhouse in a wheatfield near 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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