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묻고 돌아오는 길이다. 슬픈 밤, 사람이 오지 않는 뒷산에 홀로 너의 차가워진 시신을 묻을 때, 나뭇가지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까마귀. 그 까마귀의 조용한, 검은 눈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집에 돌아가,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 아주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을 생각이다. 욕조에 한 발을 넣으면, 물이 찰랑이면서 욕조 밖으로 살짝 넘쳐흐르겠지. 물이 살짝 넘쳐흐를 때, 어쩌면 내 마음도 넘쳐흐를지도 모른다.
너는, 왜 죽어야 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는 왜 삼 년간 나의 주변을 말없이 맴돌았을까에 대한 대답만큼, 멀리 있는 듯하다. 어째서 제대로 된 대답을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까. 무거운 현관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고요가 잠든 채로 나를 반기지도 않는다. 나는 일부러 기척을 내며 신발을 벗고, 어두운 거실을 유유히 가로질러 불을 탁 하고 켠다. 땀에 젖은 셔츠를 벗기 전에 정장 재킷을 벗고, 느릿하게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물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연한 풀빛으로 찰랑거리는 물 위로 나의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 나는 걸치고 있는 옷을 전부 벗고, 욕조 안으로 한 발씩 천천히 들어간다.
물은, 넘친다. 나는 몸을 완전히 담그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폐 속으로 밀려들었던 슬픈 공기가 남김없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근육이 천천히 이완을 시작한다. 까마귀의 고요한, 검은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네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왔던 그 가을의 쓸쓸한 호숫가에도 까마귀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는 오만한 입술, 빈틈없는 검은 눈동자, 까마귀처럼 검은 옷차림, 너의 존재를 휘감고 있는 검정의 무궁함과 야릇한 공포, 납빛 얼굴의 은은한 미소. 나는 너를 떠올릴 때마다, 너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미간이 움찔거리고, 존재의 헐벗은 나무의 가지 끝, 달랑 매달린 잎사귀가 가벼이 몸을 떤다.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잎사귀가 허무하게 떨어지는 날에, 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 가지 더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너의 무례하고 오만한 통찰에 굴복하고 마는 꼴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베네치아로의 유학이나 아픈 여동생의 간병 따위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생각일 뿐이다. 사실 그것들은 내 삶을 지탱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걸, 나보다 잘 이해하는 너는, 이제 차가운 침묵 속에 묻혀 있다. 너는 냉엄한 지면을 뚫고 한 송이 푸른 꽃을 가까스로 피워낼 수는 있을지라도,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너는 죽었다. "사랑해줘요."라고 조용한 밤의 목소리로 속삭이던 너를, 내 손으로 죽였다. 너는 아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눈을 감았다. 흔한 말이지만, 잠을 자듯 조용히 죽었다.
검정의 야릇한 목소리로 나의 냉담한 고막을 휘젓던 너. 이름 모를 지병처럼, 불행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찾아와, 삼 년 동안 삶을 서서히 쑥대밭으로 만들어간 너. 나는 더 이상 너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불행, 병집,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범죄인, 새벽의 눈물 냄새, 새벽의 착란 따위는 더 이상 너의 이름이 아니다. 내가 너를 죽였던 건,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의 정체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너를 부르는 몇 글자의 나긋한 이름은 있었지만, 그것이 너의 정체는 아니었지. 나의 혼란과 무지의 기약 없는 지속이 악몽처럼 다가왔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면, 누가 나를 이해해줄까. 아마도 너 말고는, 나의 변명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를 묻은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눈앞에는 잡초가 무성한 매장터의 쓸쓸한 풍경이 펼쳐진다. 억세 보이는 잡초들은 함부로 자를 수가 없다. 너를 보호하는 듯하다.
억센 잡초들 사이를 손으로 헤집어보니, 진분홍 엉겅퀴꽃이 고개를 든다. 엉겅퀴꽃과 검은 눈의 까마귀와 콧속으로 깊게 스며드는 짙은 풀냄새. 사람이 묻힌 곳은, 묻힌 사람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나는 생각한다.
나는 몸에 타월을 휘감고 욕실을 나선다. 욕실은 희뿌연 수증기로 가득하지만, 나의 머릿속은 명징하다. 옷장에서 무채색 가운을 꺼내 몸에 걸치고 허리끈을 묶는다. 블라인드를 올린다. 밤이 다가와 있다. 나는 젖은 머리를 닦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 몸을 뉘이고, 팔걸이를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댄다. 마지막 저녁에, 그러니까 몇 시간 전 저물녘에 너는 쓸쓸함을 감춘 얼굴로, 여전히 검기만 한 옷차림 속에 영혼을 가둔 채로, 꿈가루처럼 보드라운 먼지가 쌓인 책상 위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나는 너의 출입을 허락한 일이 없었다. 나는 너를 나가라고 몰아세우는 대신, 두 발자국 정확하게 이동한 다음,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향기가 좋은 담배를 피우지 않겠어? 하고. 그러자 너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뒤로 주홍빛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 다음 순간 너는 단숨에 달려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너는 입가에 피어오르려는 잔잔한 미소를 감춘 채, 얇고 긴 속눈썹을 내려뜨리고 나의 가슴께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그리고 나의 심장 소리를 도청했다.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한참 나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나의 조용한 눈동자에 오롯이 담기는 주홍빛 노을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너의 따듯한 머리가 닿았던 가슴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쌀쌀한 가을바람에 식어버린다. 조건도, 이유도 없는 맹목적인 접근으로 나를 조금씩 미지의 불안 속에 밀어 넣던 네가,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그 순간, 세상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나는 물론 너를 마주 안지 않았다. 불가해란 마음은 절정으로 치달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것에 찔려 피가 조금 흘렀다. 나는 그 순간,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냉정한 이성이 너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의 물기가 두피 아래로 스며들어 생각의 온도를 몇 도 낮춘다. 그러나 나는 서늘한 눈(雪)의 여인처럼 차가워진 이성을 가지고 더 이상 생각할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다. 이 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는 것뿐이다. 멀지 않은 먼 곳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 울려온다. 아까 너의 납빛 시신을 묻을 때,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녀석일까. 까마귀 우는 소리 계속 울려온다.
오만한 동물치고 날카롭지 않은 목소리가 감미롭다. 밤의 휘장을 부드럽게 흔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