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한 줄의 문구를 보고, 어쩜 내가 너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과 그리도 닮아 있을까 하며 속으로 남몰래 감탄했다. 영화 포스터의 색감은 청량했다. 나는 여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 포스터를 집어 들고, 팝콘과 콜라를 가지고 오는 너에게 갔다. 아직 무슨 영화를 볼지 정하지 않았기에, 그 일본 영화를 보고 싶었다. 나는 원래 사랑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포스터 아래쪽에 하얀 바탕체로 새겨진 그 한 줄의 문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입생 시절, 연기 동아리에서 연기하는 너를 보고 내가 느낀 마음과 같은 문장.
너는 특유의 무심한 눈길로 포스터를 슥 훑어보더니, 보고 싶으면 보자, 했다. 사랑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건 너도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네가 흔쾌히 영화 선택권을 양보해줄 만큼 너그러운 기분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야의 영화관은 한산한 편이었다. 네가 영화를 사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팝콘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커플이 몇 쌍 있었다. 여름 나시옷을 입은 여자와 흰 셔츠를 입은 남자 커플을 별생각 없이 건너다보다,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쳐버려서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훔쳐본 꼴이 되고 말았다. 민망해하고 있는 사이 발권을 마친 네가 영화표를 손에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를 작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너는 자리에 앉으면서 끝나고 집에서 자고 갈 거냐고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나는 글쎄에, 하며 뜸을 들였다. 나는 그런 너의 단도직입적인 면을 좋아했다. 오늘은 내가 너를 내려다봐도 될까? 하자 너는 질색을 했다. 나는 너의 질색하는 얼굴을 좋아했다. 그날, 반반팝콘을 먹었던 것 같다. 캐러멜 맛 팝콘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바로 어니언 맛 팝콘을 반 움큼 정도 퍼 먹는 너의 터프함(?)에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는데, 그때 나 자신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캐러멜 맛을 먹었다. 너는 핸드폰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심야 영화관의 한산한 분위기를 둘러보기도 하고, 의미 없이 스크롤을 내리는 너의 집중한 얼굴을 슬쩍 구경하기도 했다.
기사를 읽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야구보다는 축구에 관심이 많은 너이니, 그쪽 기사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 기사를 보고 있는 걸까. 너의 정치 성향은 뭐지. 너는 너의 전 여자친구에게 정치 성향을 오픈했을까. 너의 전 여자친구도 네가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다는 걸 알고 있을까. 정확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왜인지 너답게 느껴지는, 케이스를 끼우지 않은 핸드폰, 비밀스러운 잠금장치를 풀면 들어갈 수 있는 갤러리 속에,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남아 있을까. 만약 남아 있다면, 그 얼굴은 전 여자친구의 얼굴일까, 아니면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론 상상할 수도 없는 반전의 인물일까. 나는 생각했다. 너는 누구지. 내 앞에 앉아있는 너는 도대체 누굴까. 어느덧 입장 시간이 다가왔고, 너는 들어가자며 일어났다. 그리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팝콘과 콜라를 양손에 나눠 들고 극장 입구 쪽으로 저벅저벅 갔다.
간단한 검표를 마치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극장 내부는 어두웠고, 스크린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너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고, 화재 대피 안내가 나올 때, 나는 붉은 손수건이 묶인 너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청춘의 청량한 감성이 잔뜩 도배된 일본 영화는, 양들의 침묵을 좋아하는 너에겐 일단 유치할 것 같았고, 나는 순간순간 민망해지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볼 만했다. 눈이 특히 예쁜 여자 주인공이,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서, 저 멀리 서 있는 남자 주인공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영화의 빛은 치사량이었다. 나도 문득 빛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빛나는 사랑 영화를 보고 있으니, 나의 사랑도 빛나고 싶어져. 하지만, 나의 빛은 조금 어두운 게 좋아.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자가 쓰고 있던 모자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 화면은 날아간 모자를 비추지 않고, 남아 있는 여자와 남자의 작은 재회를 비추었다. 나는 그즈음 너를 무의식적으로 돌아보았고, 네가 한 손에 머리를 받치고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걸 보았다.
우리 죽을까 같이? 나는 너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자 너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꿈에 잊고 싶은 사람이 나왔는데, 나한테 같이 죽자고 하더라. 너는 영화관을 나오며 잠을 막 깼을 때의 낮은 목소리로 흘리듯이 말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게 누구였냐고 물었다. 너는 강해 보이는 엄지로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꾹 누르고,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머니.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예쁘고 젊었던 어머니. 뭔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기에 나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어두운 잠을 헤매다 꿈을 꾸었다. 너는 나의 어깨에, 무거운 이마를 떨어뜨리고 느긋하게 호흡하더니 나무 뿌리 같은 단단한 두 팔로 점점 나의 몸을 옥죄어 왔다. 거대한 사막방울뱀이 사냥감의 숨통을 서서히 죄어오듯. 나는 꿈에서, 지금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 시간이란 걸 알았다. 내가 더 이상 꼼짝 못하고 네게 갇혀버렸을 때 너는 새카만 눈동자로 말했다. "제발 나를."
나는 으악!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그 뒷말을 듣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며칠 동안 너를 피해다니려고 최선을 다했다. 웃긴 건, 너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피해다니는 쪽이 먼저 지쳐, 다시 너의 연락을 성의껏 받기 시작했다. 어느 날 너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술이나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늦은 저녁 술을 몇 잔 걸친 너는 그동안 왜 자신을 피해다녔냐고 가벼이 추궁했고, 나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티가 났냐고 말했다. 장난하지 말고. 네가 바로 받아쳤다. 나는 갑자기 술이 필요한 기분이 되어 소주잔에 투명한 소주를 따라 두 번에 꺾어마셨다. 너 그거 연기 아니었지. 내가 툭 쏘아붙였다. 당연히 너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발 사랑해달라고 했잖아. 너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확신이 들었나요?」
「내 기분의 이유가 그 남자라는 걸 깨달았을 때.」
늦은 밤, 영화 속에서는 또 진부한 사랑의 대사가 오고가고 있었다. 자막 없이 볼 걸 그랬나. 나는 오징어 다리를 뜯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저런 대사에 면역이 되어있지 않았다. 네가 없는 나의 집은 심심하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영화를 자주 본다. 보통 심야 시간에 영화를 트는데, 끝까지 다 본 영화는 거의 없다. 한 시간이 넘어가면 슬슬 지루해지고, 둘이라면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을 내용도 혼자서는 재미없다. 어떤 끓어오르는 사랑의 대사도 내 마음을 뜨겁게 만들지 않는다. 티비 속 푸른 눈의 잘생긴 남자 배우도 눈을 훈훈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설렘은 없다. 나는 뒤집어둔 핸드폰을 집어들고 화면 잠금을 푼다. 너의 번호를 누른다.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무정한 여자 목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네가 전화를 받는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무슨 일이야, 한다. 미안해, 깨웠구나. 내가 그리로 갈까? 나는 말한다. 너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하면서도 오지 말라고는 안 한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너의 얼굴이 선명하다.
너와 내가 헤어진다면, 나는 몇 년이 지나 새롭게 만나게 될 사람에게, 너와 똑같은 대사를 말하고 그 사람의 반응을 봐야지. 나는 좀 더 잠꼬대를 하듯이 말해야지. 나의 진심이 삼십 프로 정도 스며든 생각이다. 집 앞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너지만, 가면 네가 있을 것을 안다. 만나면 머리를 헝클여줘야지. 나는 로맨스를 추종하는 대본 작가의 머리에서 다듬어져 나온 사랑의 대사보다, 네 검은 눈의 말이 더 좋다. 검은 눈의 말은 한동안 나의 모든 기분의 이유가 되었으니, 그 대사가 사랑의 정체에 근접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작가는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사랑이 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한 번도 그것이 궁금했던 적이 없다. 나는 늘 너에게 갔고, 오늘밤도 너에게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