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저녁, 나는 혼자였다. 가을 저녁, 거기다 혼자, 고독을 느끼기에 이보다 적합한 조건도 없지만, 나는 그때 고독하지 않았다. 나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얄따란 담배 끄트머리에서 회색빛 연기가 유유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나는 너의 망설거림을 읽을 수 있었고, 절제된 표현에서는 너의 고심을, 막힘없이 나아가는 부분에선 너의 설핏 찡그려진 미간이 안개처럼 떠올랐다. 담뱃재가 부스러져 떨어졌다. 나는 너의 글을 끝까지 읽고 조용히 책자를 덮었다.
『푸른 꼬리』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문학 잡지였지만, 나는 작년 가을호부터 올해 여름호까지 빠짐없이 구해다 읽었고, 그건 오로지 너의 무심한 산문 몇 편을 읽기 위함이었다. 때로 너는 잿빛 슬픔이 연상되는 다양한 상징들로 이루어진 어설픈 시를 쓰기도 했다. 너는 너의 시가 형편없다고 때로 지나치게 비하하고는 했지만, 나는 그 잿빛에서 무궁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나는 깨끗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나는 가을의 쓸쓸함 속에서 조용히 감기를 앓고 있는 너에게 무턱대고 찾아갔고, 너는 이부자리에서 나를 맞았다.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과일 트럭 아저씨한테서 복숭아를 몇 개 샀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너는, 나보다는 내 손에 들린 묵직한 검은 봉지 안의 향기 나는 여름 과일이 더 반가운 눈치였다. 나는 너에게 잡지 읽었다고 말했다.
너는 “또?”라고 한마디 할 뿐이었다. 하지만 너는 내가, 너의 글을 읽은 것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가을호도 구해 읽으라는 말은 당연히 없었지만, 그만 찾아 읽으라는 매정한 소리도 없었기에, 나는 어쩌면 네가 나를 좀 더 받아들인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나는 너에게 혼자 앓을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했고,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지척에 두고도 혼자 너무 오래 고독한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뒷머리를 헤집으며 장롱에 기대앉는 너에게 불쑥 외출을 제안했고, 침묵이란 동의를 얻어낸 다음, 너를 저녁 거리로 끌고 나왔다. 따스한 손을 가진 감기와의 밀애로 인해 너의 이마는 조금 뜨거웠다. 약 먹었어? 내가 묻자, 너는 먹었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다시 묻지는 않았다. 그림자가 늘어지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계속 좁혀졌다 멀어졌다 했다. 너는 얇은 목도리를 흘러내릴 듯 대충 휘감고 있었고, 목도리 자락이 이따금 바람에 휘날렸다.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 같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어디를 갈까? 우리 처음 봤던 수족관?
—물색이 추워.
—그럼 술이나 할까.
—좋지.
그리하여 나는 너와 어둑한 술집에 들어갔고, 술집의 향기를 들이마시자 너는 묘하게 생기를 띠었다. 일본 술과 안주를 시켰다. 너는 독한 사케를 물처럼 넘겼다. 나도 너를 따라 몇 잔 먹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너는 봇물 터지듯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주로 네가 혼자 감기를 앓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읽었던 책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간혹 음악과 영화 이야기도 끼어들었다. 나는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음악도 영화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너의 이야기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신기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웠으며 푸른 꼬리로 내 마음을 휘젓듯 능란했다. 우울한 잿빛 인간의 초상화가 연상되는 시들은 사실 너의 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너는 생기가 넘쳤다. 그건 술의 영향이었을까. 일부러인지 지갑을 놓고 온 너의 몫까지 내가 계산하고 술집을 나서니, 이미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너는 한 뼘 차이로 술집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목도리 자락이 날렸다.
나는 네가 있는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나보다 키가 살짝 작은 너를 의연히 내려다보다 입맞춤을 나누었다. 나보다 의연한 너였다. 나는 손끝을 조금 떨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 나는 아무런 핑계도 준비하지 않고, 너를 찾아갔다. 너는 누워있지 않고 벽에 기대앉은 채로 나를 맞이했다. 너는 커튼을 쳤다. 방 안은 어둑해졌다. 내가 너무 어두운 거 아니냐고 하자, 너는 약을 먹었더니 잠이 온다고 그랬다. 너는 정말 좀 피곤한 얼굴이었다. 나는 전날 내가 사 온 복숭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복숭아는 검은 봉지에 담긴 채 신발장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는 봉지에서 복숭아를 꺼내서 한 개씩 향을 맡아보고, 가장 달콤한 체취를 가진 것을 골라 부엌에서 깎았다. 사실 껍질을 벗길 때부터 살짝 불안했다. 설마! 하고 너에게 가져다주기 전에 한 조각을 먼저 먹어보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 떫었다. 과일 트럭 아저씨의 자신만만해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완전히 속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을 깎아볼까, 하고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방 안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떫은 복숭아를 가지고 너에게 갔다. 너는 복숭아를 보더니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목마르다, 어서 줘봐. 네가 말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먹겠다고 하는 너였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 복숭아를 나눠 먹었다.
너는 군말 없이,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복숭아를 열심히 찍어 먹었다. 나는 네게 떫은 걸 먹이기 싫은 마음에 경쟁하듯이 더 열심히 먹었다. 그랬더니 접시는 금방 비워졌다. 너는 복숭아를 다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자리에 누웠다. 잠 잘 오겠다. 네가 말했다. 너는 정말로 피곤한 얼굴이어서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내일 올 때, 맛있는 복숭아를 사 오겠다고 하자, 너는 빙긋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순간 목이 메었는데, 도대체 왜 그런 감정이 올라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남은 다섯 알의 복숭아를 담은 검은 봉지를 왼손에 들고, 내일 저녁쯤 오겠노라고 다시 말했다.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떫은 복숭아 한 알만 주라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으니 그냥 머리맡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이나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봉지를 열고 개중 탐스러워 보이는 복숭아를 꺼내 너에게 건넸다. 너는 덥석 받았다. 그리고 복숭아를, 습작 노트와 펜이 상시 놓여 있는 너의 머리맡에 두었다. 복숭아는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너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양장 노트 속에는, 무수한 불면의 흔적들과 나비 날갯짓 같은 공상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언제 한 번 네가 잠이 들었을 때, 몰래 훔쳐 읽어봐야겠다는, 그런 나쁜 생각을 하면서 나는 너의 집을 나섰다. 가을 저녁, 나는 혼자 거리를 걸었다. 푸른 저녁 하늘에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