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 멀리 있는 너도 내일부터 다시 학교를 나가겠구나. 가을인 것 같다. 불어오는 바람이, 더는 여름의 열기를 머금고 있지 않네. 나는 언제부턴가 편지를 안 쓰게 돼. 보낼 사람도 없고, 보내고 싶은 사람도 없어. 나의 친구인 너는 언제든 나의 편지를 반겨주겠지만, 밤을 새워 너에게 편지를 쓰던 그 시절은 흘러간 계절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야. 너에게 사랑의 표현을 남발하던 밤들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너도, 나도 서로에게 진심이었기 때문에, 너를 향한 내 순수한 마음과 나를 향한 네 수줍은 마음이 하모니처럼 어울렸지.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쓴다. 여고 시절의 순수한 마음이 향기처럼 떠도는 방 안에서 늦여름의 쓸쓸한 바람을 맞으며. 너는 그와 잘 헤어졌어. 이유 없이 눈물은 나지만, 헤어져서 후련하다던 너의 선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너는 참 선한 사람이지. 그 남자는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걸. 잘못을 빌고 싶은 날이 올 거야. 그때쯤 너는 그 사람을 완전히 잊었겠지. 벌써 통쾌하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 아둔한 사람의 머리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빛나는 유머들, 사소한 다정함, 반듯한 말투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배신은 참 믿어지지 않아. 너도 충격이 컸고, 나도 너만큼 뒤통수가 아팠지. 나는, 솔직히 그를 믿었다구. 쓸쓸해 보이지만, 웃음은 온정적이길래. “좋은 사람 같은데?” 이 말을 네게 한 것을 너무 후회해.
당분간은 연애를 쉬고 공부에 전념한다던 너의 말에서 묘한 포부가 느껴져서 좋다. 너는 그를 생각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지도 않았고, 청승맞은 달빛 아래서 자해하는 시늉을 하지도 않았지. 너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내게 금빛 술을 따라주었고, 나는 그런 네가 좋아서 너의 입에 사과를 넣어주었지. 네가 성숙하게 느껴질 때 나는 어리광 어린 미소를 띠는 걸 참을 수 없어. 뭐라도 네 입에 넣어주고 싶고, 바보 같은 말로 너를 웃겨주고 싶어지지. 그 둘만의 밤에, 나는 오랜만에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 기분이 산뜻했어. 네게 편지를 보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던 긴 긴 밤들, 학교 마치고 먹던 군것질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귀갓길에 길어지던 두 개의 그림자, 그 빈 골목을 채우던 너와 나의 이야기들. 강아지 가을이.
너와 내가 돌봐주었던, 떠돌이 강아지 가을이의 짧은 행복과 슬픈 죽음을 주제로 짧은 산문을 써서, 나의 현재 애인에게 보여주었더니 한 번 읽고는 휙 던져버렸어. 감상적. 이 한마디만 남기고. 나는 기가 찼지만, 윤아, 그 순간에 솔직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나는 그 사람에게 고마웠어. 나도 사실 쓰면서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했거든. 가을이의 죽음, 그때는 눈물뿐이었지만, 지금은 추억의 조각일 뿐이야. 나는 어쩌면 더 이상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 것들에게 매달려서 구차하게 슬픔을 구걸하고 있는지도 몰라. 너는 요새 글이 잘 써지니? 나는 잘 써지지도 않고, 반대도 아니야. 가끔은 지금처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막혀버려서,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글쓰기를 좀 쉬어야 하나 생각하기도 해.
Z는 낙담한 내게, 가끔 바람처럼 다가와 입을 맞추고 사라지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의 애인이 아니야. 위에서 애인이라고 칭하지 않았느냐고? 거짓말이었어. 이 말을 읽으면, 너는 혹시 Z라는 남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허구가 아니야. 너무나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지. 그럼 넌 또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Z 같은, 나를 매혹하는 동시에 늘 반투명함으로 의문과 해석을 요구하는, 그런 우아한 대상이 곁에 있는데 왜 글이 막힌다는 걸까, 하고. 나도 그건 의문이야. Z에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넘쳐 흘러나올 정도는 아니기 때문일까. 억지로 척박한 땅을 파서, 보석으로 위장한 유리 조각을 보석인 척 문장에 박고 싶지는 않기에 나는 기다릴 뿐이야. 침묵할 뿐이야. 이제 저녁은, 여름보다 가을. 매미들은 정념의 투사라는 지위에서 물러나 하나둘 죽고 있다.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뭔지 아니? 쓰르라미. Z가, 이따금 내게 바람처럼 입을 맞추고 사라지는 이상한 그 남자가, 내게 문학잡지 창간호 제목을 추천해달라고 하길래, 매미에서 연상된 쓰르라미를 나오는 대로 뱉었거든. 그도 좋았나 봐. 마음에 든다면서 쓰르라미를 한 음절씩 천천히 발음해보더니, “그래, 이거야.” 하더라. 그가 좋아하니 나도 좋더라. 여름이 끝나가는 마당에 쓰르라미라는 제목은 조금 미련스레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서 사랑스러운 것 같기도 해. 여름, 뒤에는 가을. 나는 아직 가을을 맞을 준비가 안 됐는데,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선선해진다. 내일부터 학교라니, 말도 안 돼. 방학을 다시 보낼 수 있다면 너와 바다를 보러 갈 텐데. 너와 단둘이 말이야. 파도를 보면서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겨울엔 만날 수 있겠지? 그때쯤 너는 왠지 멋진 연애를 하고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동안 나의 글을 열심히 찾아가고 있을게. 우리도 잡지나 하나 만들까. 제목은, 사막의 꽃,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