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정 무렵 Y 씨의 답장을 받고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네, 그럼요. 다른 건 궁금하지 않습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젖은 머리를 말리고, 소파에 누워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시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켰다. Y 씨의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덕분에 행복하군요.] 나는 향긋한 커피 향기가 풍기는 Y 씨의 초연하고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초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시골 들녘. 고즈넉한 들녘 한가운데 변함없이 쓸쓸한, Y 씨의 카페. 그곳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커피 냄새와 여유. 억지로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셔야 하는 사람이나 급한 일을 처리하기 전에 열정의 연료를 충전하기 위해 입에 무언가라도 욱여넣어야 하는 사람은, 그 카페에 맞는 손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Y 씨는 여유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오지 않은 손님들에게도 똑같이 정중하며, 일하는 데 집중이 되는 클래식을 골라 틀어주기도 한다. 미뤄둔 의무에 쫓기는 손님의 피곤한 뒤통수를 바라보는 Y 씨의 눈빛은, 은은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동시에, 뭐라 형용될 수 없는 부러움이 감돈다.
정확한 병명도 없이, 날로 스러져 가는 그의 건강. 그 젊은 나이에, 가슴속 야망의 정체를 파헤쳐보기도 전에 그 야망을 색종이 접듯이 접어서 허공에 날리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로 내려와, 소란도, 사건도 없는 들녘의 카페를 제 무덤 삼아 가꾸고 있는 Y 씨의 삶. 오로지 그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슬픔의 시들. 알콩달콩 사이가 좋아 보이는 젊은 신혼부부나 앉은자리에서 일고여덟 시간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글을 쓰는 데 매진하는 문학청년을 뒤에서 바라보는 Y 씨의 눈빛엔, 언제나 형용될 수 없는 부러움이 감돈다. 나는 야망을 잃은 시체입니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Y 씨의 옆모습이 떠오른다. 초저녁의 들판을 아득히 바라보던 눈빛. 먼 곳을 갈망하던 그 눈빛. 그것을 떠올리자 왠지 숙연해졌다.
카페 주인의 허물어져 가는 납작한 가슴에, 쓸쓸한 가을바람 대신 새로운 애정이 불어왔다. 상대는 카페 주인의 충성적인 고객 중 하나인 문학청년의 누나이고, 그들은 처음 만난 날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금방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Y 씨의 행복하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나 덕분에 행복하다는 그의 말은 물론 이상하다.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준 차분한 미모의 여인도 아니고, 그 여인을 직접 소개해주었을 뿐 아니라 카페 주인에게 예술의 길로 나아가라는 무모한 조언을 서슴지 않는 문학청년도 아니고, 나 덕분에 행복하다니. 나는 그에게 해준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데도, 나는 매일 밤 그의 행복을 빌었다. 그 기도가 그에게 들렸을 리는 없는데. 겨울에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겨울에 그는 그녀와 결혼했을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씁쓸할 때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버릇이 있던 사람을 떠올리며 나도 그 버릇을 따라 해보았다. 우리는 왜 이 쓸쓸함을 벗어나기 힘들까.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 가을밤의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양쪽 눈꼬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혼자 있는 밤에 눈물이 난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청승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슬픔을 배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눈물을 다 흘려보내고 나서, 나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가슴 위에 두 손을 포개고 잠을 청했다. 심장의 차분한 박동이 손바닥 위로 전해졌다. 나는 잠이 들었다. 나는 꿈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돌았다. 어린 시절의 빛깔은 온화했고, 햇살이 들이비치는 거실은 정다웠다. 엄마가 있었고, 아빠도 있었고, 지금은 죽고 없는 초롱이(강아지)도 건강한 몸으로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한참 꿈속에 머물렀다. 햇살을 얼굴에 문질러 발랐고, 구름을 한 조각 떼어먹었고, 푸른 하늘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발을 까딱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다정한 품이 나를 안는 듯한 기분에 눈을 슬며시 떴다. 어둠 속에서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툭, 목소리가 터졌다.
“빌어먹을.”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너를 찾을 수 없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알고, Y 씨도 알고, 독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잠을 잘 때 입는 면 소재의 원피스 위에 겉옷을 걸쳐 입고 슬리퍼를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하늘에 별이 한두 개 보였다. 핸드폰을 가지고 나오는 걸 깜박했다는 걸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가을밤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폐 속으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고요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나는 걷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없어서도 아니고,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의 곁을 떠나왔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은 나의 기분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기분이 다시 원상태를 회복하기를, 평소의 차분하고 의연한 나 자신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거리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심야버스를 탔다.
나는 버스 창가에 이마를 기대고 어둠에 잠긴 거리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나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홍영에게 갈까. 나의 친구. 희림에게 갈까.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아니면 대학에서 같이 원어민 영어 수업을 들으며 친구가 된, 혼혈인 한에게 가서 잠을 부르기 좋은 미드를 좀 추천해달라고 할까. 아니면, 불면의 밤에 잠을 부를 수 있는 검증된 묘법이 있다면 공유해달라고 부탁할까. 한의 둥글고 선한 얼굴이 생각났다. 너는 한의 뿔테 안경이 못생겼다고 무시했고, 나는 네가 한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일 때마다 한에게 미안했다. 너는 한의 멍청한 웃음이, 언제나 남의 의견에 수더분한 긍정의 의사를 표시하는 태도의 게으름이, 그리고 유머라고 착각하는 유머들이 저열해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한의 유머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너는 유머를 몰랐다.
적어도 내 앞에서, 너는 재밌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한은 너에게 늘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너는 한결같이 한을 무시했다. 나는 네가 왜 그리 한을 미워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연애의 로망이란 게 있는 사람이기에, 네가 혹시 한을 질투하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너 그거 질투 아니냐는 나의 물음에, 너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비웃음이나 진심을 감추기 위한 박장대소가 아니라 ‘얘가 제정신이 아니네.’ 하는 무시의 헛웃음이었다. 짜증이 났다. 나는 너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어 바닥에 던지고 심술을 부리듯이 꾹꾹 짓밟았다. 너는 내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건강 좀 생각해. 내가 말했다. 너는 아무런 말도 없이 허리를 굽혀 성난 구두코에 납작해진 담배꽁초를 주워서는,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너에게 점잖은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심야버스는 어둠 속을 달렸다. 나는 더 이상 한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대로 달리면,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늦여름 바람에 산들거리던 들판을 생각했다. 연 씨의 그림, 내겐 최고라고 말할걸. 연 씨가 타주는 커피, 조금만 덜 쓰면 좋겠다고 말해줄걸. 나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했다. 연 씨가 타주시는 커피는 너무 씁쓸합니다. 우리 좀 더 달착지근하게 살면 안 될까요. 하고 말하는 상상을 하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 씨, 나는 연 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건 연 씨도 알고 있지? 나는 그저 연 씨의 행복한 모습을 옆에서 보고 싶을 뿐이야. 사랑은 그런 것과는 좀 다른 무엇이잖아. 이렇게 평온하고 다정하기만 한 감정이면 안 되는 무엇이잖아. 나는 어떤 불행한 인간에게, 사랑은 불행한 것이라고 배웠다구. 연 씨는 행복해야 해. 나는 연 씨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으니까. 알겠어요? 그 여자가 못되게 굴면 나에게 와. 나도 그때 행복을 좀 배워보게.
창문에 기댄 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버스 창문을 조금 열고 바람을 맞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곧 내려야 할 곳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나는 문득, 손수건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차 안에서 이별하던 날도, 네가 왼쪽 손목에 묶고 있던 그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 꽃무늬 손수건. 꽃무늬 손수건이라고 하면, 자칫 촌스러운 디자인이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나름 백화점 브랜드 손수건이었고, 한눈에 나의 물욕을 사로잡은 고혹적인 디자인의 손수건이었다. 물론 너를 위한 선물은 아니었고, 마침 세일을 하길래 내가 쓰려고 산 것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너의 왼쪽 손목에 묶여 있었지.
이별하는 날까지도 너는 그 손수건을 묶고 있었는데, 이제는 버렸을까. 그 손수건, 너에게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나와의 기억을 처분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손수건을 버려야 하겠지만, 너무 잘 어울렸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르지만. 너의 다부진 손목에 부적처럼 묶인 핏빛 손수건……. 어느 밤, 너와 나는 야간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과 말 사이에 잠시 침묵이 끼어들었을 때, 너는 뜬금없이 혹시 몸에 문신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문신한 사람을 싫어해서 미리 묻는 것인가 생각했다. 내가 없다고 대답하자, 너는 그러냐, 한마디 했을 뿐이다. 좋다는 거야, 아쉽다는 거야. 나는 네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너의 뜬금없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때쯤, 너는 갓길에 차를 멈춰 세우더니 나에게 보여줄 게 있다며 왼쪽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너는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이고 보여주었다.
“이런 것도, 그냥 문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분명히, 무언가를 시도한 흔적이었다.
이게 뭐냐고 묻자 너는 보이는 그대로, 라고 대답했다. 나는 너와 사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있기도 힘들었다. 어쩌다 이랬는데? 내가 묻자, 너는소매를 내리고는 다시차를 출발시켰다. 어둠 속을 응시하는 너의 옆모습이 묘하게 고단해 보였다. 날카로운 날로 여러 번 그은 듯한 그 상처가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나는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나는 상처를 본 순간의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너의 집을 드나드는 사이가 되었고, 너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은 달라졌다. 몇 달 만에, 너는 손목의 상처가 너의 엑스(이하 X)와 관련된 것이라고 짧게 실토했고, 그건 술의 마법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X는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X는 문학에 관심 없는 너의 마음도 홀리는 악마의 필력이었다.
X는 휘몰아치는 악의 속삭임으로 너의 숨통을 죄었고, 무척 매혹적인 문장들을 배출했다. X의 글에 등장하는 애인은 언제나 너였고, 그 애인의 불행을 쓰기 위해선 네가 불행해야 했다. 도대체 제대로 된 묘사를 들은 적이 없어, X가 어떤 사람인지 머릿속에 그릴 수도 없지만, 분명히 무서운 매력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X는 너에게 죽음을 속삭였다고 했다. X는 행복과 무위의 일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독한 예술의 절경으로 너를 매일 밤 질질 끌고 갔고, 너는 순순히 가주었다고 했다. X란 사람은 성무선악설을 믿었고, 부모님에게는 깍듯했고, 너에게 보여주는 글과 지면에 발표하는 글이 완전히 달랐고, 오로지 너와 있을 때만 자신의 안에 있는 악의 상상력을 거침없이 분출하고는 했다. 갈 곳 없는 불나방이던 너는 아름답게 타오르는 붉은 불꽃을 향해 돌진했고,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달려들기를 멈출 수 없었다. 너는 말하겠지. 오로지 X만이, 진정한 예술가란 자신의 예술에 타살당해야 한다고 말하던 X만이 진짜 예술가라고. 너는 말하겠지. 나나 내가 좋아하는 Y 씨는 너의 기준에서 절대 아름다운 예술을 할 수 없는 어린애들이라고. 너는 너의 애인이 하라는 대로 너의 애인 앞에서 손목을 그었던 밤을, 그러나 예술로 기억하지는 않았다. 너는 후회했고, 괴로워했다. 당연했다. 너는 X의 정신을 따라잡을 수 없을뿐더러, 네가 X와의 관계에서 바랐던 단 한 가지는 X의 애정이었을 테니까. X는 너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오른 손목을 그었고, 흔들리는 너를 붙잡아주듯 손을 잡아주었다. 아프진 않은데, 죽을까? 네가 물었다. 아니, 안 죽어. X가 대답했다. 너는 비로소 안심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 세상에는 참 다양한 정신병이 있구나.
나는 어느 밤 너의 차 안에서, 너의 손목에 손수건을 감아주었다. 응, 잘 어울린다. 내가 말했다. 있잖아, 나는 화상 자국 같은 거 없어.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너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아무런 말 없이 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네가 손목을 놓지 못하도록 너의 손을 겹쳐 잡았다. 지옥의 손바닥에 잡히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네가 손을 떼니, 손목에는 선명한 화상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버스 창문에서 머리를 뗐다. 이제 내려야 했다. 나는 카드를 찍고 버스에서 내렸다. 너와 자주 산책했던 공원을 돌면서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제 아무런 자국도 남아 있지 않은, 멀끔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모두 잘 있을까. 너의 엑스도. 지도에 없는 오지를 탐험하는 극악한 취미가 있다고 했었는데. 나는 허전한 손목을 문지르면서 가로등 불빛을 향해서 걸었다. 아무리 어둠을 헤매도 결국은 불빛이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