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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Aug 21. 2024

가을을 위한 첫 소설

습작


 그녀는 카페에서 책을 읽고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걸 좋아했다. 스물한 살, 평소 습관대로 팔을 괴고 조용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그녀의 모습을 마음에 두고 있던 누군가가, 해 질 녘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뒤에서 이런 우스운 이야기를 했다. “혹시 죽어가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거나 연락이 안 되는 애인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는 분위기라 해야 하나, 그런 게 느껴져서.” 그녀가 재밌어하며 웃자 남자도 웃으면서 아니면 말고요. 했다. 그녀는 카페를 나와 그 엉뚱한 미대 학생과 해 질 녘 거리를 걸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고양이를 키우지도, 연락 문제로 속을 썩이는 애인도 없었다. 그녀는 그때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제는 멀리 사는, 중학 시절부터 단짝처럼 지내 온 그림쟁이 동성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세상은 외롭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의 봄을 더 보낸 그녀는 반은 변했고 반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여전히 연애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귀여운 남동생 같은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단짝 친구를 보니 자신의 위치가 조금 흔들린다고 느꼈다. 물론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금방 친구의 변화를 받아들였고, 친구가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운 강릉 여행을 남자 친구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이유로 취소했을 때도 여행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가벼운 접촉 사고였고, 다행히 친구의 애인은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래도 친구는 너무나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가 키우던 햄스터가 아플 때 같이 울어주고, 나중에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평화로운 요양원에서 같이 여생을 만끽하자던, 웃음이 많은 그녀의 친구를 빼앗겼다는 생각까지는 물론 하지 않은 그녀였다. 그러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자신보다 가까운 친구가 생기자 갑자기 세상이 조금 적적해진 그녀였다. 가을이다. 여전히 물결 잔잔한 바다가 내다보이는, 소란과 동떨어진 조용한 요양원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기대되는 일이라는 것에 변함이 없는 그녀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녀와 오후 세 시쯤 만나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식물원을 돌아다니고, 저녁을 먹고, 음악이 시끄러운 카페에서 각자 읽고 싶은 소설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는 늘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그의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외로워 보여서가 아니라 그와 있는 시간이 좋아서 같이 있고 싶었다. 그건 생각보다 큰 차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때 그녀는 거의 매일 그를 만나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있는 미대 학생이 유학을 떠나기 전, 그녀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그를 모셔와 친한 선배라면서 소개를 해주었다. 정말이지 뜬금없는 만남이었다. 그는 시종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어색함을 풀기 위한 질문을 던져도 세 마디를 넘지 않는 선에서 간결하게 대꾸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를 데리고 온, 그의 세 살 어린 후배이자 그녀보다도 한 살이 어린 미술학도는 이런 화제 저런 화제 던져가며 대화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술자리를 좋은 분위기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C의 모습에 내심 감동 비슷한 것을 느낀 그녀는 대화에 충실히 참여했고, 두 사람의 끊이지 않는 말소리 덕분에 술자리는 그럭저럭 즐거운 빛을 띠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서 그는 조용히 술만 마셨다. 그녀는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술잔에 찰랑이는 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졸린 듯 눈을 감고 살짝 미소를 짓는 얼굴이 그녀에겐 보였다.


 그날 밤, 술에 약한 C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그는 그러고 있지 말고 그냥 자빠져 자라며 C를 갈구고 그녀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두 살이 연상인 그가 따라준 술을 천천히 마셨다. 술에서 이상하게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C는 벌겋게 취한 얼굴로 더 마실 수 있다고 우겼다. 그녀는 피곤하면 잠깐 눈을 붙이라고 했다. C의 친한 선배는 C의 허술한 손아귀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고 이따 나갈 때 깨워주겠다고 무심히 뱉었다. C는 그럼 그를 믿고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하며 노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곧 코 고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그녀는 코를 고는 C를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있는 그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는 술이 돌기 시작하면서 말이 많아졌다. 그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있었다는 말이 걸려서 그녀는 조심히 물었다. 죽은 지 1년 됐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었는데요, 꿈도 못 펼쳐 보고 그렇게 됐네요. C가 제 여동생을 좋아했었어요. 여동생도 C의 스케치 모델이 되어주는 걸 좋아했고. C도 안 됐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C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조용하고 슬펐다. 그녀는 그에게 혹시 여동생 사진을 보여줄 수 있냐고 했다. 그는 흔쾌히 지갑 속에서 여동생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단정한 시선, 검은 눈동자, 웃을 때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 길고 차분한 목선, 어딘가 조숙해 보이는 분위기가 그의 여동생임을 증명했다. 그녀는 눈꺼풀을 내려뜨리고 사진 속의 미소 짓는 여자애를 한참 바라보았다. 갑자기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시 지갑 속에 사진을 넣었다. 그녀는 잊을 만하면 자신의 그림이 상을 탔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하는 화술로 그녀를 잠시 즐겁게 해주던 C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C는 늘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는 자신보다 키가 살짝 작은 C를 온몸으로 부축하고 술집을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조용히 뒤를 따랐을 뿐이다. C가 그보다 키가 살짝 작다고는 해도 체격이 더 좋았기 때문에, 그는 걸어가다가 힘든지 “아주 취할 작정으로 나를 부른 거였군요. 그쪽한테는 부축받을 수가 없으니” 하고 그녀를 향해 투덜거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C는 눈을 감고 있어서 잠에 취한 것처럼 보였으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떻게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물론 부축해주는 그가 없었다면 C는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을 것이다. 아니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서 이마와 가지런한 하얀 이빨이 깨졌을 것이다. 그녀는 그날의 흐릿한 밤하늘을 기억한다. 멀어지던 그들의 뒷모습도, 그런 그들의 위태로운 밤길을 조용히 비추던 달빛도.


 그녀는 어느 가을날, 그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오래된 이 층짜리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에 있었고, 그중에서도 낡아 보이는 붉은 벽돌집이었다. 문은 그녀를 기다리는 듯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천장을 바라본 채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았다. 불을 붙이지는 않고 그냥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인기척을 내며 다가가자,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가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그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소파 뒤에서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쏙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뭐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옆집 아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옆집 아이의 딱한 사정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녀가 아이의 사정을 듣는 동안 아이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선우라는 이름을 가진 옆집 아이는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늘 심심하다는 것이다. 옆집 아주머니와 안면이 있는 그는 마음과 시간이 남는 날이면 아주머니의 아이를 돌봐주고, 아이에게 그림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소파 뒤로 가보니 그의 말대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있었다. 아이는 스케치북 위에 엄마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고 아들은 웃는 얼굴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모자 뒤로는 굴뚝집이 있었고, 굴뚝집의 굴뚝에서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해는 없었으나 날씨는 푸르렀다.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작업이 남아 있어서 아이에게 집중할 수가 없으니, 자신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만 그녀가 아이와 그림을 그리거나 텔레비전을 봐줄 수 있냐고 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 담배를 찔러 넣고 그녀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쟤 얌전한 애야. 말썽부리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녀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있어 줄 거지?’라고 말하듯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미소에 넘어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도 그날은 그녀대로 할 일이 있었고, 그것은 늦어지면 안 되는 신뢰와 생계에 관련된 일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무보다 눈앞의 '있어 줄 거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녀는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글을 쓰고 있었는데 영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고, 잠시 바람을 쐴 수 있는 숨구멍이 필요했다. 물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부탁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고맙다는 듯이 그녀의 한쪽 어깨를 어루만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삼촌 어디가? 아이가 말했다. 아이는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삼촌 일하러 가. 삼촌 여자친구랑 놀아. 미쳤어. 삼촌 여자친구 있었어? 아이는 방방 뛰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아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아줌마가 삼촌 여자친구예요? 라고 물었다. 그야말로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일단 그녀는 아줌마라고 불릴 나이가 아닐뿐더러, 어떻게 삼촌의 여자친구를 칭하는 말이 아줌마가 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이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몇 살이에요?”

 “삼촌보다 두 살 어려.”

 “아. 그럼 누나네.”


 아이는 태평한 말투로 정정하고는 다시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을 색칠하기 시작했다. 나 그림 잘 그리죠? 아이는 지붕을 빨간 크레파스로 칠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응, 잘 그린다. 하고 대답했다. 내가 나중에 삼촌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 하고 아이가 말했다. 그녀는 아이의 자신감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대답하려는 찰나에 아이는 금방 주제를 바꿔서 그녀에게 물었다. 삼촌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녀는 그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끄덕거렸다. 누나는 삼촌이 왜 좋아요? 아이가 또 물었다. 아이는 이제 스케치북을 한 장 넘겨 새로운 백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또 엄마 그림인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의 거침없는 손길을 구경하느라 잠시 대답이 늦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좋으니까 좋은 거지. 이유가 필요하나? 그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좋으면 삼촌 좀 데려가세요. 아이가 말했다. 그럴까?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새로 착수한 그림이 마음에 안 드는지 죽 뜯더니 구겨서 던져버렸다. 삼촌이 안 좋은 버릇을 가르쳐줬구나. 그녀가 말하자 아이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또 엄마 그릴 거니?”

 “응.”

 “왜?”

 “엄마 보고 싶어서요. 근데 엄마는 가끔 나한테 화를 내요."


 아이는 계속 말했다. 화를 낸다는 엄마는 그림 속에서 다정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나는 삼촌이 혼자일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졸라서 삼촌 집에 찾아와요.”

 “그런 거였어?”

 “응.”
 “삼촌이 너를 봐주는 게 아니고 네가 삼촌을 봐주는 거였구나?”

 “응.”


 아이는 집중했는지 급격히 말수가 없어졌다. 아이는 가을을 그렸다. 가을 속에 서 있는 엄마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외딴 굴뚝집을 그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주홍빛의 노을이 거실을 물들였다. 아이는 색칠을 시작한 무렵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곧 아이의 엄마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아이는 결국 무거운 이마를 툭 떨어뜨렸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아이의 이마를 받쳐주었다. 그녀는 손바닥에 닿은 이마의 체온을 느꼈다. 그녀는 크레파스를 손에 꾹 쥐고 잠이 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쉽사리 손을 빼거나 아이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피곤한 아이는 그녀의 손바닥에 이마를 대고 노을빛 꿈을 꾸었다. 해 질 녘 거리에서 엄마가 자신을 부르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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