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젠가 흘러내리는 생일초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있었다. 시의 내용이 딱히 인상 깊었던 건 아니지만, 생일초와 당신이라는 조합이 좋았다. 지금은 다시 보여달라고 해도, 머릿속에서도 컴퓨터 저장공간에서도 소실되어 찾을 수가 없다는 그 시를 나는 생일초 시라고 불렀다. 당신은 어렴풋이 그런 시를 썼던 기억이 아른거릴 뿐, 구체적인 내용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었다. 왠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는 당신에게 생일초 시에서 기억나는 비유나 분위기를 말하진 않고, 그저 가끔 지나가는 말로 생일초 시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당신은 저물녘 하늘의 푸름을 등지고 왠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잘 쓰지도 못한 시."라고 말했다. 잘 쓴 시라서 다시 보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데, 그것까지 말하면 상황이 복잡해지므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취약했을 때 남긴 기록물은 굳이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결론을 짓게 됐다. 당신의 이마가 더없이 삭막했던 시절, 당신의 머리카락이 외롭고 입술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시절, 자다 말고 일어나 머리맡에 놓인 종이에 끄적이었던. 어쩌면 그저 악몽의 기록이었을지도 모를 한 장의 시. 당신은 내게, 이미 사라져버린 그 시가 그렇게 소중하냐고 천진하게 물었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의 거대한 캔버스는 그저 오렌지색으로 가득했고, 나는 오렌지색에서 어떤 문장도 읽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고요히 밝혀진 생일초의 불꽃도 오렌지빛이었으니 뭔가 연관이 있는 그림일까. 나는 깊게 추측하기엔 바깥에서 쌓인 피로가 너무 무거웠다. 불을 붙이기 무섭게 녹아내리기 시작한 생일초에서 시의 화자는 흘러내리는 자신의 웃음을 보았고, 그것은 결코 제어할 수 없이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었는데, 어딘가 요염히 일그러진 웃음이었고. 나는 그 오묘한 웃음으로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던 탓으로, 더는 시처럼 웃지 않는 당신의 서늘한 무표정이 가끔 막막했던 것이다. 사랑해주세요 나를. 이라고 마지막 연을 맺은 시가 있었는데, 불쑥 다가온 당신은 마지막 연에 줄을 찍찍 긋더니 이렇게 바꾸라고 조언했다.
'당신이여 천진하고 요염하게 울어주세요.'
나는 그 한 줄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내가 원하는 느낌에서 벗어났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밑에 한 줄을 더 붙여보았다. 당신이여 천진하고 요염하게 울어주세요. 그날 썩은 오렌지나무 아래서처럼. 나는 당신이 마지막 연을 멋대로 바꾸는 바람에 결국 시를 망쳤고, 나머지 무고한 문장들까지 쓰레기통에 들어가버렸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당신을 향해 내가 원하는 건 잘 쓴 시도, 좋은 시도 아니라고 말했다. 어쩌면 가장 시답지 않은 시. 손댈 수 없는 엉터리스러움. 시인 척하는, 시이면 안 되는 것. 그냥 늘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비 내릴 것 같은 음악만 들었더니 진짜 비가 내렸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나는 길을 나섰다. 나의 하루가 빚어지는 장소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안면이 구겨졌다. 아― 지옥이야!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고, 새끼를 잃은 젊은 늑대처럼 구슬피 목청을 뽑았고, 그러자 금방 다시 평온해졌다. 마음이 먼저 펴지고 그 다음에 천천히 얼굴이 펴졌다. 지옥이라고 울부짖는 순간에 이미 지옥을 벗어날 희망을 준비하고 있는 나는 끝내 나락을 알 수 없었다. 가끔 추락하는 기분으로 신호등을 기다리지만, 불행해지기 전에 늘 빨간 불은 초록 불로 바뀌었다. 아니면 초록 불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당신처럼 음울하고 성숙하게 담배를 피우는 방법을 알고 싶었지만, 본능적인 공포 때문에 연기를 깊이 들이마실 수 없었다. 그런 내게 당신은,
"비극적이군."
하며 음울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당신도 때로 불그스름히 미소를 짓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비와 재즈가 섞이는 날이었다. 그런 밤에는 당신의 대충 잡힌 머리 모양을 천천히 망가뜨리면서 농담하듯이 말하곤 했다. 오래 살아 있으라고. 그게 싫으면 오래 죽어가기라도 하라고. 당신은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내 안의 어딘가가 조금 부서져내리는 것 같았다. 빗소리에 훼손되는 마음을 재즈가 살렸고, 재즈가 흔드는 마음은 빗소리가 잡아주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