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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13. 2024

빛을 찾아서

소설


  그녀가 음울히 돌아왔다. 악령과 싸우는 중인 그에게. 그들은 젊었고,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초르스름한 저녁이었다. 그녀는 현관에서 조용히 구두를 벗고, 남자의 방문을 열었다.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었다. 그녀의 코끝에 담배 냄새가 스치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옆에 놔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에게 이리 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갔다. 그의 담배 냄새 나는 손이 탁탁 치는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앉으면서 ‘다소곳이’라는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책상다리는 불편해서 편한 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더니, 그가 편하게 앉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지막이 이게 편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투박한 손이 그녀의 왼쪽 눈썹뼈 부근을 진찰하듯 만지자, 그녀는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피가 난다.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왜 그런 거지. 그녀는 꼭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그의 손이 계속 자신의 상처 주변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고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음악이 훌륭한 지하 술집에서 음악을 들으며 알코올 없는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녀는 그 두 사람의 싸움을 멍하니 지켜보며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무엇과 무엇이 싸운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며 알코올 없는 술을 마시는 사이, 그들의 싸움은 격해졌고, 그들을 말리려는 종업원도 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짙은 혐오감을 느꼈다. 어딜 가나 싸움이 끊이질 않는군. 그녀가 생각했다. 바깥에도, 내부에도 늘 싸움이 있었다. 술잔이 깨지고 의자가 날아갔다. 테이블이 부수어지고 코피가 터졌다. 분수처럼. 그녀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고, 어두운 구석 자리에서 굴하지 않고 둘만의 밀회를 즐기는 연인을 지나,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고. 코피 흘리는 남자에게 올라탄 양복 입은 늙은 남자의 높이 쳐들린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없었고, 해야 하는 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미 코피를 흘리는 남자에게 지치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려는 양복의 잔인함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것뿐이었다.


  그녀는 순간 눈앞에서 별이 보였다. 사람들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순간 너무나 놀랐지만, 천천히 시야가 돌아오면서 마음이 차츰 차분해졌다. 그녀는 왼쪽 눈썹뼈 위를 조심스레 더듬어보았고,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어 양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지옥이 들끓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맥주병으로 후려친 남자를, 파괴하고 싶다는 하나의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깊고 강렬한 것이어서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었다. 당신 하나를 죽일 수 있다면 세상을 전부 파괴해도 좋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선생님은 그녀의 무릎 위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토록 뜨겁고 강렬한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그녀가 순종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파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죠. 그녀의 말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어르는 듯한 눈빛이 그녀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악령과 싸우느라 깨진 그의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평화를 불러오려 애썼다. 뒷일이 걱정되는지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된 양복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섰다. 그 순간 지구가 경계하는 건 양복 입은 남자가 아니라 그녀였다. 그녀의 분노는 어느 먼 행성의 궤도를 살짝 뒤틀었다. 분노를 사랑하는 그 검은 행성은 멀리 있는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아주 멀리 있는 지옥의 냄새를. 그녀의 행성은 진득하게 포효했다. 검은 용암을 내뿜었다. 지구는 여린 감각 기관으로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구는 잠시 몸서리를 쳤다. 그녀의 지옥 같은 분노에 침 흘리는 검은 행성은 평생 지속되는 밤 속에서 지구의 여린 이목구비를 상상하며 몽정하였다. 그녀는 엉망이 된 현장으로부터 덤덤히 멀어져갔다. 왼쪽 눈썹뼈 부근의 찢어진 상처가 몹시 아팠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하염없이 걸었다.


  초르스름한 저녁을 에워싼 침묵의 공기 속에서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그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신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어요.


  “새끼 악령? 시적 표현으로 말이야.”


  그녀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음울한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였다.


  “시적 표현 없인 말을 못 하나?”

  “어렵지.”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그는 그녀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그녀에게 해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아무도 해친 적 없는 그의 손을 십자가처럼 붙잡은 채, 그녀는 나쁜 마음을 품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아무의 골통도 부수지 않을 거야. 남자의 골통도, 내 마음이 검어지고 있는 사이에도 밀애의 속삭임을 멈추지 않은 연인의 골통도, 어깨를 스친 도끼눈 행인의 골통도. 그들의 뇌수는 역한 냄새를 풍길 테니까. 그녀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곤 부드럽게 스르르 놓았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잠시 행복해졌다. 그녀는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그는 무덤처럼 쌓인 시를 가리키며, 악령의 상처를 돌보는 중이었지, 하고 말했다. 사실 악령은 나고, 그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 나는 상처받은 인간이고, 남을 치유할 능력 따윈 없지.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기껏해야 상처를 만지는 데 쓰고 있어. 손목 안쪽을 매일 몇 분간 닦는데도 흉터는 그대로군. 아마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빛은 저기에 있을 거예요.

    

  그녀는 무덤처럼 시가 쌓인 곳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그윽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뇌수가 찰랑이는 소리는 늘 그녀를 즐겁게 했다. 한때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매혹하던 그가, 어느 날 잠시 은둔하리라는 말과 함께 좁은 방 안에 틀어박혀 지금까지 묵묵하게 자신의 말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가끔은 산책을 하지만. 그보다 더 가끔, 아주 희귀한 경우에, 그는 향수를 뿌리고 밤 외출을 했다.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물건들을 때려 부수고 그의 옷가지들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그가 아끼는 담배도 갖다버렸다. 그가 쓰는 각종 습작을 다 불태워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아까워서 그러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의 글을 아꼈다. 글은 건드리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친 몸으로 그의 방에 드러누워 그의 향수병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늦지 않게 그가 돌아왔다. 그는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난리를 몇 번 반복하니 그가 향수를 뿌리고 밤에 외출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녀는 새끼 악령이었다. 새끼 악령은 싱긋 웃었다. 어쩌면 그녀는 새끼 악령보다 더 위험하고 심오한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그의 시선 탓으로 그녀는 새끼 악령이었다.


  그는 새끼에 불과한 악령에게, 악령인데도 불구하고 악하지 못한 그녀에게 연민 어린 감정을 가졌다. 혼자서도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고 싶은데,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미안하다고 하면 그녀는 그를 꼭 안아주고는 했다.


  저녁 어스름이 드리우자 그녀는 커튼을 닫자고 했고, 그는 아직 햇빛이 좀 남았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상처에 거즈를 대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상처를 보고 너무 초연하게 대응하진 않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이 놀랐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기 때문에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네게 행복을 가르쳐줘보지. 그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으나 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거짓말을 하게 했다. 그녀의 눈빛은 그에게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는 이기적인 행복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경계했지만 저릿한 얼굴로 자신을 원하는 그녀에게 한 발 다가가는 걸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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