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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0. 2024

변심의 담담한 기록

소설


  문을 열고 들어오니 집안은 담배 연기가 자옥했고, 발끝에 쓰레기들이 채였다. 아아. 오늘은 그가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천천히 부엌을 지나 넓은 거실로 향했다. 불이 꺼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누운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우선 그를 지나쳐 밖으로 통하는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 연기를 뺐다. 도대체 얼마나 피워대면 이 넓은 거실에 연기가 자옥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속에서 피어나는 일말의 염려를 조용히 삼키고 베란다를 나와 소파 앞에 섰다. 그는 부스스한 모양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왔니.


  그가 말했다. 네. 요즘 자주 오시네요. 나는 차분히 대꾸했다. 그리고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고 천천히 두 무릎을 꿇고 소파에 걸터앉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여전히 매캐한 듯 쓸쓸한 담배 연기가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옅어지기는커녕 더욱 짙게 코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단지 그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묘파하기 위하여 나의 왼손바닥에 기댄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내가 그의 얼굴을 조각 같은 얼굴이라고 어느 글에 언급한 것을 두고, 그는 허허 웃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욕이 무섭지 않냐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겸손을 떨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눈빛에 왕과 같은 오만이 감도는 그였다. 뭐라고 적을까. 쉽게 홀리는 심약한 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는 음지 식물, 아니 그보다는 고대의 숲을 지키는 문지기. 달빛 아래서 오래 노닐던 시절 창백하게 깨끗하였던 피부는 절망의 태양 아래서 보기 좋게 그을렸고, 시를 읊조리는 날보다 세속적인 욕망을 속삭이는 날이 많아진 입술은 생기를 잃고 칙칙해졌다.


  퇴폐. 그의 상태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이것이었다. 아득한 고대부터 화려하나 속이 빈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지하게 흐르기만 하는 세월에 환멸 아닌 환멸을 느낀 그는 오직 순간의 향락을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더럽혔고, 사랑하는 여자의 등에 짐승의 발톱 자국을 새겼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꾸 타락하여 가는 자신을 관망하고 비웃는 데서 새로운 삶의 재미를 찾은 듯했고, 지옥의 신은 그의 불행한 방종을 기쁜 일로 여겼는지 그의 몸은 날로 바위 같은 단단함을 갖추었다. 담배 연기처럼 자옥한 세월 속에서 그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나는 전부 알지 못한다. 나는 그의 아득한 과거를 캐물을 생각이 없고 또 그도 내가 묻지 않는 걸 고맙게 여기는 듯하다. 다만 그는 나의 과거를 알려고 하는 집착이 강해서 가끔 곤란하다. 언젠가 취기로 시작된 그의 취조가, 모든 것을 망치길 좋아하는 그 본능이 달빛 아래서 발광의 빛을 발하더니 기어이 나의 양어깨를 짐승의 발로 찍어 누르며 답하라 나직이 명령하였다. 나는 거칠게 뛰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숨기고 차분한 눈빛으로 교환을 제안했고, 그제야 서서히 눈빛이 돌아온 그가 나에게 먼저 말해준 한 조각의 과거는 음, 꽤 참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우물 속에 내던졌던 자옥한 취기의 밤의 기억을 내게 고해하였다. 그의 표정은 점점 괴로움이 묻었다.


  나는 교환의 원리에 따라 내가 죽으려고 했던 밤의 우울한 사정과 분위기를 최대한 상세하게 꾸며서 전달하였는데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술을 몇 잔이나 들이켰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자살 따위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막연히 죽음이란 뭘까 하는 생각은 곧잘 했지만.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그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어린 아들은 지지한 세월 속에서 장성하여 아버지를 끔찍하게 혐오하는 자가 되었고, 등가죽에 아버지의 발톱이 훑고 간 애욕의 흉터를 남몰래 더듬으며 지내는 어머니를 지극히 보살피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한때 누군가의 남편이었으며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 도리가 없다고 그는 나직이 한탄하면서 나의 머리칼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었다. 그때 머리카락이 쓸어 넘겨지며 어깨를 간질이던 감각이 지지한 세월 속에서도 잊어버려지지 않아, 나는 가끔 거울 앞에서 혼자 그가 했던 것처럼 은근하고 느린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 넘겨보지만 그날의 느낌은 되살지 않았다.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숨결이 더 이상 지구의 심장을 간질이지 않는다는 걸 지구와 한 심장을 공유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만 와요. 당신 더 이상 보기 싫어.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어.

  슬프세요?

  응 슬프다마다.

  당신이랑 있으면 나도 당신을 닮아가. 나는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 사람, 그냥 이유 없이 같이 있고 싶은 사람 말이에요.

  외롭니?

  ……네. 아저씨가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요.

  그래. 네가 사람들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야 내가 죽어주고 끝내지.

  죽는다고?

  그래. 나는 죽어야지. 슬퍼야지. 나를 분쇄할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져.

  분쇄되면 아프지 않아요?

  얘야. 그런 걸 걱정하면 안 되지.

  걱정하는 건 아닌데.


  그는 예의 그 허허 웃는 웃음을 내 앞에서 다시금 웃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야. 분쇄의 순간 나는 사라질 테니까.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떡하죠?

  사람들 속에서 너의 자리를 찾든가 아니면 나를 따라 죽고 고대의 숲에서 끝나지 않는 신혼을 보내든가 선택은 네 몫이다.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럼 살아.


  그는 너무 많은 말을 했는지 피곤한 낯으로 다시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길게 누웠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붙이려 했지만, 신통한 주제도 무난한 주제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그저 조금 풀 죽은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끌어안았다. 거실을 탁하게 흐리던 담배 연기가 조금씩 걷혀 나의 비강으로는 어느덧 신선한 공기가 드나들었다. 부연 연기로 가득한 폐속으로 청명한 겨울 공기가 밀려들자 되려 기침이 날 것 같았다. 언제 어느 시대에나 인생은 무서운 것인가? 나는 생각하였다. 아니, 나는 인생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인생이 무섭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이다. 아아 정서의 고독이 문제다. 그도 정서의 고독이 문제다. 그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데도 불구하고 고독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했지……. 어쨌든 그가 사라져준다니 나는 다른 내일을 꿈 꿀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조금 더 풍성해질까. 내일은 내게 편지가 올까. 내일 오후 몇 시에 나는 최초의 외출을 나설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잡념에 무거워진 이마를 무릎 위에 파묻으며 신선한 공기 한켠에 은은히 남아있는 잿빛의 유혹을 조심스럽게 호흡하였다. 잿빛의 유혹이 비강으로 흘러들었다. 전혀 신선하지 못한, 텁텁할 뿐인 유혹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탄탄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춥지 않아? 그가 말했다.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은 신선한 자극이었기에 창문을 닫고 싶지 않았다. 추워요. 그래도 조금 더 맞지요. 내가 나의 뒤통수를 받치는 허벅지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었다——는 말을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지 어쩌면 그만은 이해하되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찬 바람이 새어 든 입안이 어지간히 시려서 술을 조금 마시니 다시 따스하게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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