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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6. 2024

희윤이라는 소녀


1

내 마음 속에는 희윤이라는 소녀가 산다. 희윤은 내가 밟고 싶은 것을 대신 밟아주고 내가 안고 싶은 것을 대신 안아준다. 희윤에게는 안기는 것과 안는 것이 다른 행위가 아니다. 희윤의 오라버니의 이름도 희윤인데 그는 가장 지옥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 있는 이를 찾겠다며 집을 나갔다


희윤의 오라버니 희윤은 가장 지옥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 있는 이와 가족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한때 희윤의 오라버니는 건반을 스치는 희윤의 손가락에서 무언가를 보기도 했으나 오라버니 된 도리에서 희윤을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희윤이 떠나고 희윤은 과묵한 성격이 되었다


침묵을 좋아하는 얼굴이 되었다 기껏 사람과 가족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오라버니가 희윤은 밉지 않았다 희윤은 오라버니가 부럽기도 하였고 짠하기도 하였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그것이 없어서 괴로워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꽃처럼 붉은 울음*을 가슴에 묻었다



2

남자의 서늘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희윤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빠는 가족을 찾았을까 불우한 피아니스트일까 피아니스트의 피 묻은 손끝에 더러운 천을 감아주거나 버터를 발라주며 금방 나을 거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뭐 이러고 있을까 희윤은 웃기다고 생각했다


요즘 희윤은 남자와 매일 밀회를 가졌다 비단 같은 달빛 위에 남자가 자신을 눕히면 희윤은 자연스럽게 남자의 목을 그러안았다 희윤은 녹지 않으려고 녹지 않으려고 애쓰며 정신을 다잡는 그의 얼굴을 보기를 좋아했는데 그런 얼굴을 못 본 지가 오래돼서 요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자리가 없었다 희윤은 남자가 마구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모든 밤에 입맞춤은 없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 느닷없이 성스러운 벌을 내리듯 입술을 누른다면 그의 색다른 표정을 볼 수 있을 것도 같아서 희윤은 혼자 고민에 잠긴 채 눈을 감았다


남자의 이목구비가 깜깜해지자 어디든 입맞춤을 기다리는 자리인 것 같아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희윤은 깜깜해진 그가 좋았다 그가 부단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깜깜해진 남자는 무한한 검은 가능성 같았다 무엇이든 써넣을 수 있는 검은 종이 검은 상상력 같았다 죽을 사를 쓸 수도 있고 맑을 정을 쓸 수도 있는 한 입 뜯어먹을 수도 있고 먹힐 수도 있는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서정주 「문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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