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초저녁에 눈을 떴다. 뉘엿뉘엿—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무심하고 은은한 저녘놀. 남자는 천천히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몽몽한 선잠에서 쫓겨나듯 눈을 뜬 것은 고작 2cm 정도 열린 창문 틈새로 솔솔 새어 들어오는 싸늘한 바람 때문이었다. 남자는 바로 일어나 창문을 닫지 않고 벽장에 몸을 기댄 채, 잠시 창 너머의 은은한 저물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긋하게도 지는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는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헤집으며 쩍 하품을 했다. 그는 무거운 몸을 벽장에 기댄 채 잠시 집안이 이토록 적막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내의 부재만이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아내의 부재도 집안을 적막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나흘 전, 그의 장모가 눈길에 넘어져서 작은 타박상을 입었다는 연락을 받고 그날 밤 짐을 싸서 그의 장모가 입원한 병원으로 출발했다. 아내는 집을 나서면서 남편에게, 곯지 말고 하루 두 끼는 꼭 챙겨 먹으라고 무심한 듯 진지한 어조로 당부했다. 남자는 그때도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게으르게 헤집으면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훠이훠이, 논밭에 모인 까마귀 떼를 쫓는 듯한 모양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아내는 대문을 나서기 전, 그를 한 번 돌아보고는 어떤 말도 없이, 의식할 만한 어떤 표정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남자는 아내가 대문을 열고 나간 뒤에도 얼마 동안 현관문 앞에 서서 아내가 떠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너무 쌀쌀해서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온 그는 바로 이부자리에 누웠고, 잠시 천장무늬를 가지고 철학을 하다 잠귀의 손에 끌려가듯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설익은 검은 밤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오래된 책상, 자신의 몸과 마음만큼 오래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이런 문장을 적었다.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막연한 표현 대신, 하루 두 끼라는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여자의 심리는? 여자는 내가, 그녀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하루에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그건 좀 너무 과한데, 라는 생각을 할 것인가. 쌀을 너무 축냈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다정을 글로 배운 듯한 미소를 지을 그 여자가 나의 아내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이런저런 약의 이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렇게 적어 놓고서도, 자신이 적은 문장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나흘 전 자신이, 온전치 못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온전한 정신으로 쓴 그 문장을 다시 읽기 위하여 노트를 펼쳐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노트의 거칠거칠한 표지는 낡은 티가 났다. 그는 그 노트의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이 가진 것은 전부 낡은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스피린, 아달린, 모르핀, 모르핀—. 그는 문득 개를 키우게 된다면, 정확히는 아직 성견이 되지 않은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면 이름을 모르핀이라고 지어줘야겠다는, 다소 터무니없는 생각을 품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 새끼개에게 자신은 신일 텐데, 자신의 태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그 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에게 신으로서의 비뚤어진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심리. 그저,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 마음 속으로 중얼대는 괴상한 헛생각. 그러나 그는 자신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노트에 적지는 않았다. 남자는 아내가 집을 비운 동안 이상하리만치 푹 잘 잤다.
남자는 이제 꽤 쌀쌀해졌다. 창문을 닫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남자는 지금의 아내 앞에서 한 번도 아픈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아프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짧고 굵게 동거한, 입술 위에 점이 있던, 붉은 옷이 잘 어울리는, 꽤 미인형의 여자 앞에서는 제법 자주 골골거렸다. 그녀는 처음 몇 번은 지극한 정성을 다해 그를 보살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극의 정도가 낮아졌고, 갈라서기 직전에 그가 순전한 부주의로 인해 독감에 걸렸을 때는 말없이 눈을 흘겼을 뿐이다. 남자는 아직도 그녀가 왜 자신에게 눈을 흘긴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 새침한 눈 흘김에서 상처난 사랑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도. 그러나 그것도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남자는 지나간 여인에 대한 생각을 서랍 속에 곱게 넣어두고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남자는 창문을 닫는 대신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과연 아내가 탐탁해 할까, 하던 의문이 무색하게, 그는 나흘 동안 세 끼밖에 먹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를 찾지 않았고, 그도 구태여 자신을 찾지 않는 세상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신혼집이라는 가난하고 냄새 나는 은둔처에서 자신의 부재를 꾸몄다. 남자는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이나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다’라는 말의 은은한 해학을 떠올리면서 상상 속의 여인(실은 여인보다는 나이가 어리고, 어리숙한 느낌이 강한 소녀였는데)이 주는 밥상을 받아 상상 속에서 배를 채웠다. 상상 속에서도 찬은 식어 있었다. 그는 괜히 입속이 추워지는 듯한 느낌에 침을 꼴딱 삼키고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무심히 응시했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아내에 대한, 그러니까 현재 아내에 대한 자유로운 산문을 한 편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몸을 움직여 엎드려 누운 자세로, 노트에 생각나는 대로 아내의 얼굴이나 말버릇, 웃을 때 안면 근육이 일그러지듯 사랑스러워지는 모양, 성격의 부분부분들을 꾸물대는 필체로 적어보았다.
‘나의 아내는 약을 모은다. 벌써 백사기 그릇이 반쯤 찼다. 아내는 알약이 조약돌 알갱이처럼 소복이 쌓인 그릇을 지그시 마주하면 마음에 묘한 평화가 온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건 허울만 좋은 연극이다. 나의 아내는 거짓된 사람이리라.’ 남자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얼마간 아내에 대한 험담 아닌 애정, 또는 애정 같은 험담을 조심조심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 에잇—하고 노트를 덮었다. 그는 추워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는 아내가 돌아오면 가을용 이불을 겨울용으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그가 해 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상하게 그러기 싫었다. 그는 아내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집으로 전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잘 있냐고, 하루에 두 끼를 잘 챙겨 먹고 있냐고 묻는 연락을 아내는 묵묵히 삼가고 있었다. 남자는 그러려니 했다. 결혼할 때,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는 남처럼 하기로 했다. 그는 그때의 이기적인 약속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것. 남자의 사상은 그러했으나 현실은 남자의 생각과 달랐다. 아내는 한 달에 한두 번은 친정을 방문했다. 장모는 아내를 보고 싶어 했다.
남자는 결혼식 이후로 장인 장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보지 않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아내도 그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는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가 어떤 심리로 자신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인지, 이제 신혼 생활이라는 장난에 그다지 애착이 없어 보이는 아내도 속으로는 둘만의 허름한 성을 허물기 싫은 마음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이런저런 호기심은 가슴 밑바닥에서 떠돌 뿐이었다. 남자는 언젠가 아내의 일기장을 훔쳐본 일이 있었다. 타인의 내밀한 속내가 적힌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다. 그는 자신의 노트만큼이나 손때가 탄 아내의 일기장에서 자신과의 결혼 생활이 언급된 부분을 찾으려고 열중했는데, 실제로 결혼 생활이 언급된 부분은 극히 적었다. 심지어 그 얼마 없는 내용마저도, 후회와 회한의 회색빛이 거칠게 덧칠되어 있었다. 남자는 아내의 아름답지 못한 속마음을 읽으면서도 즐거워 킬킬거렸다. 일기장 속의 게으르고, 말수가 적고, 일주일 중 칠 일은 까치집을 짓고 있는 눈빛만 예리하게 빛나는 어수룩한 남자가 마치 완전히 남인 것마냥. 남자는 그와 아내의 실패로 기울어진 듯 보이는 생활의 감상을 엿보는 게 즐거웠다.
그날 남자가 책자를 뒤에서 앞으로 후루룩 훑는 평소의 습관대로 맨 뒷장에 손을 댔다면, 아내의 일기장에 대한 조금 다른 감상을 가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남자가 보지 못한 그 마지막 장에는, 이런 단문이 아내의 술에 취한 듯한 글씨체로 분방하면서도 단정하게 쓰여 있었다.
‘창을 여니 눈이 퍼붓고 있다. 몇 사람이 동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무정한 밤을 나는 오도카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집안의 온도도 바깥의 온도에 비하여 완전히 귀족은 아니었다. 술을 조금 먹었다. 창을 닫아도 눈은 여전히 퍼붓고 있다. 남편과 눈. 눈은 남편과 어울리는 무엇이다. 나는 남편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적잖이 웃음이 나서 술을 자꾸 먹었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밤이다.’
만약 남자가 일기장 맨 뒷부분에 적힌 이 짧은 글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내의 거짓말 같은 속마음을 우연히 목격해버린 후유증이 그의 생활과 혼자 있을 때의 표정에 어떤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그날 밤 일기장 뒷부분에 손을 대지 않았고, 그 문단을 적었을 때만큼은 진실된 마음이었던 그의 아내도 지금은 어떤 심리로 이동하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필변이니, 뒤늦게 남자가 그녀의 고독하고도 애틋한, 마치 밤눈이 고요히 쌓이는 듯한 분위기의 문장을 읽는다 해도, 이미 다른 심리로 이동한 그녀의 마음은 남자 앞에 새로운 난제로 돌처럼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 바위를 쪼갤 망치도, 정도 없다. 다만 남자는, 그녀가 이슥한 새벽에 손에 뜨끈한 것을 들고 홀연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작은 일탈을 저지르고 싶은 헛된 충동을 누르느라 아내의 립스틱을 두 개나 뭉개버렸다.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의 형태였다.
남자는 더 이상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탁 소리 나게 창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폐부 깊숙이 스며든 한기는 그대로였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추접한 모양새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내는 돌아오겠지. 반드시 손에 뜨끈한 것을 들고.
그날 밤, 남자는 자신의 궁상을 유희거리 삼으려는 조악한 심보로 쉰 나물과 생선 한 마리와 조밥과 국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쉰 나물을 먹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상을 언젠가 써 먹을 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러한 연극적인 심리로 쉰 나물을 떡 하니 내놓았지만 한 입 먹고는 다신 손 대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변덕에 조롱의 비소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남자는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S는 남자의 고교 동창으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집에 돈이 많고, 인물이 훤칠한, 말하자면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는 친구였다. 한때 남자는 그런 친구의 무결점한 인생에 조악한 질투의 감정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잘 나가는(?) 친구에게 술이나 한번 얻어먹고 싶다는 애잔한 시기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회고였다. 정을 바라는 마음 같은 것? S는 남자의 오랜 이해자였고, 남자가 S의 다정한 아내를 탐내지 않는 한 그들의 우정은 바닷가의 고성처럼 견고할 것이다. S는 좋은 인물을 그저 그런 평범한 인물로 강등시켜버린 안경을, 그 테가 두꺼운 못생긴 안경을 벗어 안경알에 입김을 불고 셔츠 자락으로 쓱쓱 문질러 닦으면서, 남자에게 ‘나가자. 내가 살게.’라고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다. 남자는 아따 그럼 그래야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지기 앞에서는 체통을 지키며 큼, 헛기침부터 뱉었다.
남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때 절은 외투를 몸에 걸치고 모자를 썼다. 모자를 쓰면, 남자는 왠지 외모에 자신감이 생겼다. 남자는 친구와 나란히 질퍽거리는 비포장길을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들의 머리 위에 은은히 드리웠다. S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질 세라 남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십 년 전, 아버지에 대한 견고한 반항심으로 보따리 하나 싸 들고 가출한 S를 집에서 재울 적에 남자는 매일 해가 지면 S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을 나섰다. 그들은 책방과 화구를 파는 가게들을 순례하고 백화점 유리창 안쪽에서 비현실적인 각선미를 뽐내는 여자 마네킹을 조금 점잖지 못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리면 불현듯 꿈에서 깨어난 듯한 허한 얼굴들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또 한참 정처없이 떠돌았다. 음울한 기분 속에서도 곧잘 농담이 나왔고 서로는 서로의 농담을 좋아했다. S와 친분이 있는 고교 선배를 마주치면 술을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늘 묘하게 위로 받은 채로 나란히 길을 걸어 돌아왔고, 술기운이라도 도는 밤에는 지극한 우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남자는 S를 답지 않게 끌어안고 동생같이 웃으면서 비틀거렸다. S는 또 그런 동무의 순진한 모습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술냄새 난다 이녀석아— 하고 밀어내는 손에는 거절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지나간 우정의 순수를 재연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즐거움도 없었지만 침묵 속에서 지나간 날을 흐릿하게 추억하고 있었다. 검은 하늘에서 소금 같은 눈발이 폴폴 내리기 시작했다. S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좀 편찮으시다. 술도 안 드시는데 간이 망가지는 건 무슨 일인지 원.
네가 보지 않을 때 실컷 자신 거지. 많이 안 좋으시냐.
아니. 암은 아니라니까 뭐.
세상은 이리 불공평해. 술 냄새 끊일 날이 없는 내 간은 멀쩡한데 말이야.
검사해봐라.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모르는 거지.
그래서 속 썩어서 왔나? 남자가 물었다. 소금 같은 눈발은 지면에 닿자 흔적 없이 녹아서 사라졌다. S는 대답했다. 아니다 그냥. 내가 술 마실 놈이 너 밖에 더 있냐. 술은 하고 싶은데 혼자는 적적해서 온 거지. 남자는 어릴 적에도 동갑내기 S의 무심한 듯 묵직한 친근이, 꼭 친구인 남자만을 향한 게 아닌 사람 전반에 대한 허울 없는 태도가 못내 신기했다. 남자는 그런 식으로 먼저 친구를 찾는 사람이 못 되었다. 생활은 어떠냐. 남자는 물었다. S의 다정한 아내의 얼굴을 설핏 떠올리는 그였다. S는 그런 남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가 가끔 운다. 비 오면. 그냥 슬프대. 하고 아내의 안부를 전했다. 남자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왠지 잘 지내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눈 와도 슬픈가? 남자는 답지 않게 느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S는 글쎄, 하고 뜸을 들이더니 남자에게 너는 눈 오면 슬프냐고 물었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으면 슬프지. 하고 대답했다. 엄청나게 솔직한 대답이었다. 평소의 남자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에 친구는 사람 좋게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그래, 슬프지 그럼. 하고 대꾸했다. 아내는 눈 오면 좋아한다. 눈은 비와 다르나 보지. 근데 비가 얼면 눈이 되는 거 아닌가. S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얼면 덜 슬픈가보지. 남자가 대꾸했다. 꼭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덜 슬픈 것과 기쁜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눈을 좋아한다고 해도 여인 혼자 보내는 밤은 기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남자는 술동무가 필요한 것은 맞았지만 그냥 빨리 취하고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S는 어깨와 머리에 묻은 눈을 털면서 뭔 생각을 하냐고 물었다. 남자는 별 생각 안 했다고 대답했다. 저 멀리 술집이 보였다. 도시의 탐욕스러운 불빛도 어둠이 싫은 그들에게는 일종의 따스함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선술’할라냐. 친구가 말했다. 남자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술집 골목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들이 사는 곳이 욕망과 외로움의 도시라는 것이 실감났다. 그러나 이 밤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가운데는, 욕망과 고독을 앓고 있으나 그것에 지배당하지는 않는 심장들도 있을 것이다. 그저 늙어버린 지기와 재미 떨어지는 선술을 하고 싶은 그런 심장들……. 네가 사는 거지? 남자는 물었다.
S는 없어 뵈게 두 번 묻지 말라면서 남자를 거의 술집 안으로 밀어 넣다시피 떠밀고 자신은 차분한 낯으로 천막을 걷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안경에 뿌옇게 김이 꼈다. 도시의 매연 같은 구름에 가려진 달은 추운 밖에서 그들이 선술을 하러 들어간 오래된 술집을 묵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의, 술집의, 무탈하고 조용한 집안의 외로운 마음들을 품은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