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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22. 2024

마음 속으로


 시험이 끝나니, 방학이 코앞이라 좋기는 하지만, 매일 아침 등교에 서두르는 일상을 떠나 보내는 것이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다. 학교에 가고 싶다.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작은 목적이 될 수 있는 곳. 마음 맞는 친구가 있고, 온화한 목소리로 옛 사람들이 지은 시를 읽어주시는 스승이 있는 곳. 어젯밤엔 그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참 별종이라 하였다.


 나도 내가 별종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단순히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만이 나의 눈물의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더 구체적이고, 남들에겐 말하기 어색하고 창피한 이유가 마음의 아랫목에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있는지도…….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 마음은 서서히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한 해 동안 고생한 당신이 행복한 성탄절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따뜻하고 은은히 벅차기도 하는 캐럴을 한참 들었다. 낮에 한 일의 전부였다. 신나게 캐럴 듣기. 그리고 여러 따뜻한 생각을 하였다. 마음 한구석에 맴도는 이름 모를 쓸쓸함을, 그리고 허함을 잊으려고. 미련은 가을바람의 뒷모습 같다.


 나는 해가 다 진 무렵 문득, 집에서 2.5km 거리에 있는 유명한 몰에 가서 가족 중 한 사람의 생일선물로 목도리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묻히면 마음이 안정되는,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색감의 연분홍색 목도리를 사고 싶었다. 분명히 좋아할 만한,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선물한 사람의 애정이 느껴지는 그런 목도리 선물을 사려면 지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차게 일어나 세수를 했다. 해가 다 진 무렵까지 캐럴을 듣느라 그리고 마음의 유수에 멍하니 손을 담그고 송사리를 구경하느라 세수도 못하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우습게도 마음이 바뀌었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창밖의 세상은 차가운 겨울의 어둠에 잠겼고 그것은 ‘밤’이란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밤. 그는 지치지도 않고 나를 찾아오는, 말이 없고 다정한 얼굴 뒤에 망념이 가득한 남자. 때론 편한 동성.


 여자 혼자서 밤에 2.5km를 두 번, 그러니까 합치면 5km를 걸어갔다 오는 것은 생각 정리를 위한 산책보다는 무모한 충동이자 유치한 청승 같았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가지 않았다. 내가 마음의 갈등을 느끼는 동안, 내가 가족 중 한 사람의 생일을 위한 선물로 사고 싶었던 포근한 연분홍색 목도리는 누군가의 우악스런 손길에 낚아채졌을지도 모른다. 아아 내 목도리. 물론 내가 두를 것은 아니지만. 아니,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내가 놓친 목도리를 집어 든 건조한 손의 주인은 어떤 온화한 여성일지도 모른다. 근시 안경을 쓴 점잖은 남편이나 곧 생일인 조카를 위한 선물이 아닌, 자신이 쓸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의 목도리를 고르다가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가벼운 마음으로도 집어들지 않았을 색감이지만, 무채색을 사랑하던 그녀의 마음이 오늘 밤 유독 시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분홍 목도리의 주인은 그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가족이 아니라. 가족에겐, 다른 색깔의 목도리를 사주면 되지. 하고 생각했다.


 편안한 체념. 그 온화한 여성과 지저분한 수염의 쥬피타 선생, 그리고 나 셋이서 조용히 마주 보고 앉아서 김이 오르는 맑은 녹차를 마실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밖에는 포슬포슬 하얀 눈이 내리고, 녹차에선 꿈의 연기 같은 따뜻한 김이 피어 오르고.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나의 마음에 봄빛을 드리우는 그들과 함께라면 나는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 않나. 행복에 대한 정의는 매번 다른 행복에 의해 새로이 쓰여진다. 쥬피타 선생의 잡초 같은 수염 위엔 작은 나비가, 쥬피타 선생이 흘린 눈물을 귀한 양분을 취하듯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맛있니. 맛있어? 나비는 대답이 없다. 쥬피타 선생이 간혹 가다 흘리는 한두 방울의 눈물은 옷깃에 스며들거나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그의 수염에 엉기는데, 이는 그가 키우는 나비의 먹이가 된다. 사실 키운다는 말은 잘못됐다. 그냥 와서 살고 있는 나비다. 쥬피타 선생은 나비를 내쫓는 데 실패하고 그것과 심심한 동거를 택했다.


 아픔이 넘치는 세상. 모든 것을 덮어주는 눈은 언제쯤 내릴까.


 밤이 되니, 심장은 익숙한 어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겸허한 빈 공간에 익숙한 어둠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시절은 지났으니까. 아니, 멀지 않은 미래에 또 나의 마음이 약해져 자아몰입으로 위장된 폐쇄된 밤을 보내게 되더라도, 지금은 그러한 내가 아니니까. 나는 더 이상 외로워서 울지 않는다. 사는 게 힘겨워서, 나만이 외톨이인 것 같아서 애꿎은 주변사람들을 탓하거나 가닿을 수 없는 아련한 빛깔의 세상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아련한 빛깔은, 나를 온화하게 응시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임을 이젠 알고 있으니까. 나는 자리에 앉아서, 오랜만에 이상의 <불행한 계승>을 찬찬히 읽어내려 갔다. 예전에는 이 글이 그렇게 슬프고 깊게 와닿고 애달팠는데, 다시 읽어보니 슬픔과 비애의 감정보다는, <이 글은 이상에게 깊은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도저히 읽힐 것 같지 않은 글이다>라는 생각이 우선 드는 것이었다. 울며 웃는 듯한 문장들, 진정성 넘치는 자기연민, 괴로움.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의 그런 구체적이고 구질구질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감정의 음영(吟詠)을, 과연 얼마나 많은 현대인이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파묻혀버리고 말아야 할까.


 그런데, <불행한 계승>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 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상도 아쉬워하지 않는 것을 왜 내가 아쉬워하고 있단 말인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일방적이다.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좀 더 이 일방적인 관계에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다. 내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곳이, 여기 이곳이라는 것을 알려준 아늑한 눈빛의 사람들 덕분인 듯하다. 나는 그 사람들의 세상 속에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뭇잎과 바람의 일을 통하여 성장하고 싶다. 나뭇잎과 바람의 일, 그것은 시를 읽는 일, 시를 쓰는 일, 시를 읽는 사람을 쓰는 일, 시를 쓰는 사람을 읽는 일, 조약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 피리 소리로 별의 애간장을 끊는 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이 세상의 일이라면, 보이지 않는 영혼을 대하는 일은 은하수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애도를 위해 호롱불을 켜는 일도 마찬가지다.


 은하수를 동경하는 일은 지극히 일방적이고 소모적이며 고독하다. 나중에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 방학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아아 이렇게 시시한 인생. 동시에 경이롭기도 한. 나는 <불행한 계승>의 나기 양의 얼굴을 상상해보고, 소운의 허리께를 울며 웃는 얼굴로 쿡 찌르는 쥬피타 선생을 그려보고, 경의선 철도길과 한강 위를 유유히 건너는 놀이배와 한 순간의 고독을 잊기 위하여 돈을 주고 자신의 인생과 상관없는 여자에 대한 1회분 표를 손에 쥐는 남자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너무나도 약한 마음이라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마음은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마음이다. 시대상을 감안해야겠지만, 돈을 주고 독을 사는 남자의 심리는 언제까지든지 배척하고 싶은 무엇이다. 때 묻은 듯 내려다보고 싶은 무엇이다. 쥬피타 선생과 뒹군 은선도 괜찮다 하고, 쥬피타 선생도 ‘이게 뭐가 문제냐’하는 얼굴이니 나는 할말이 없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완벽하지 않은 사람의 정신 속에 형형하게 도사린 고고함을 지나치지 못하고, 굳이 응시하려 하는 마음 역시 지극히 불완전한 것. 나는 그냥 왠지 웃음이 난다. 따뜻한 겨울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깊이 바라는 분에게 다른 형식을 빌려 문자를 보낸 나의 도전이 썩 심심하고 좋은 결말로 마무리되었으니, 구태여 세상의 가장 어두운 주제 가운데 하나를 건드려 글을 기약 없이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그래서 수필이 가장 무서운 장르이다.


 나는 여자고, 그러기 때문에 여자를 얻기 위한 1회분 표는 살 일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쥬피타 씨보다 나은 사람인가. 내가 정말 쥬피타 씨보다 총체적으로 나은 인간인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것은 비길 테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나의 승,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건? 내가 쥬피타 씨만큼 절실하게 삶을 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람 구멍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겨울밤에 피 토할 것 같은 가슴을 누르며 깨알 같은 글씨로 된 책을 묵묵히 읽어내려 간 쥬피타 씨만큼 내가 하는 일에 절박한 적이 있었나. 나는 너무 온실 속 화초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딴에는 서럽고 힘든 일이 더러 있어서 눈물바람 후의 두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생하게 알고 있지만. 희희한 방심이 있더라도 살얼음판 위의 방심이던 그 시대 사람들의 힘듦에는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상념을 잇는 상념. 시험이 끝나니 이렇듯 생각은 자유로이 흘러간다. 늘,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펴보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손바닥만 휑하니 나를 반기는 것이다. 내가 쥐었다고 믿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애꿎은, 수명선만 선명한 나의 빈 손바닥을 손금쟁이처럼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오래 살까?


 이제 그만 마무리하고 싶다. 고단함이 없는 하루였지만, 고단한 하루를 보낸 사람처럼 오래 따뜻한 물을 맞고 싶다. 겨울에는 따뜻한 샤워를 자주 해줘야 한다. 따뜻한 샤워를 하면 금방 몸이 나른해진다. 그때 읽고 싶은 소설을 한 편 읽거나 가족과 영화를 보면 꽤 괜찮은 하루의 마무리다. 첨언, 나는 요새 종종 형제자매가 없어서 적적하다고 엄마에게 불평한다. 나는 태어나기 전에나 후에나 부모의 걱정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외동딸이다. 동생이 있었음 해? 하면 아니, 하고 딱 자른다. 언니나 오빠. 내가 원하는 건 그거. 외동의 고독함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안다. 내겐 글이 내 언니나 오빠가 되어준다.


 무엇을 쓰든 아무런 타박도 인정도 없고, 다만 ‘그래?’ ‘그러니?’ 하고 관심을 보이는.


 어때, 내 글을 읽으면 내가 좋은 사람처럼 느껴져? 너무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글을 쓰고 있으면 꼭 한마디 해줘. 그런 글을 쓸 바엔 차라리 자기연민을 할 거야.


 내겐 너무 쉽게 안겨오는 사람의 따뜻함. 동시에 너무 아득한 사람의 향기. 나는 늘 사람이 그립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머뭇거려지는 한마디인 걸까? 쥬피타 씨도 시를 쓰는 일이 모르는 사람과 술 한 잔 하는 일만 못해서 울컥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패망한 연애의 시름을 코골이로 푸는 듯 어슴푸레한 어둠 속 나무 밑에서 드르렁드르렁 자빠져 자고 있는 친구 옆에서 창백한 나라에 드리우는 희디흰 새벽빛을 바라보는 쥬피타 씨의 서글픈 얼굴을 그려본다. 지나간 인연들이 모두 안쓰러워서 목이 메는 얼굴인 듯도 하고, 그냥 죽음을 떠올리는 얼굴인 듯도 다. 이 형 때문에 나무도 꽃도 잠을 못 자네. 하고 자신이 쓰고 있던 맥고모자를 자고 있는 친구의 얼굴에 살며시 덮어주고 일어난다.




 여긴 조용하고 향기가 나는 방. 사면의 벽은 얇지만, 바람을 막아준다. 온화한 여인과 지저분한 수염의 쥬피타 선생, 그리고 나 셋이서 각자 방석을 하나씩 깔고 앉아 녹차를 마시며 이따금 말을 나눈 곳. 여자분은 미안한 미소를 지으시며 먼저 일어났다. 나는 쥬피타 선생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현관문까지 여자분을 배웅했다. 내가 이 분에게 어떤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떠나보내기 싫다. 이xx 양이 내 목소리에 가장 깊이 집중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고마웠어요 그동안. 그분께서 말하시며 봄빛 같은 미소를 짓자 나는 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어요? 그 한마디가 너무 어렵다.


 조용하고 긴 복도를 지나 다시 쥬피타 씨가 있는 방 앞에 다다랐다. 나는 미닫이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소리나지 않도록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쥬피타 씨가 빈 녹차잔 앞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빈 방석을 지나 아직 나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방석 위에 앉아 쥬피타 씨에게 녹차를 더 드시겠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것이다.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나는 쥬피타 씨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치 있게 구부러진 소나무 위에 소복이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나는 금세 심심해졌다. 쥬피타 씨, 좋은 마무리가 없을까요? 내가 묻자 쥬피타 씨는 큭큭 웃었다. 무슨 반응인지 해석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좋은 마무리란 없단 것일까. 그게 이별이든 죽음이든, 마무리라는 것은 좋을 수가 없단 뜻일까. 답지 않은 신비주의? 나는 속으로 불평하며 괜한 어색함에 쥬피타 씨의 눈을 피해 눈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았다. 소나무 가지가, 가장 굵고 참을성 있어 보이는 가지가, 나의 마음처럼 우지끈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잃은 것도 없는데 매번 잃어요. 어떤 말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는 마음의 방에서 나는 그런 말을 취한 듯이 지껄였더랬다. 사실 나의 정신은 완전히 말짱했고,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손을 뻗었다.


 맥을 짚는 모양으로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가만히 목 아래서 뛰는 경동맥의 맥박을 느꼈다. 쥬피타 씨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나의 검지와 중지 아래서, 피부 아래서 힘차진 않아도 멈추지 않고 뛰는 맥박이, 그 맥박이, 이상할 정도로 소중했다. 나는 사람의 엄청난 건축물이나 시보다 이 맥박이 좋은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읽었는지, 쥬피타 씨는 그럼 나의 맥박을 소저에게 주리다. 라고 했다. 이미 은선인지 나기 양인지한테 팔렸잖아요? 하고 싶었으나 눈이 내리는 마당의 고요가 좋았으므로, 그것 참 좋은 말씀이군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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