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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모 Aug 02. 2022

젖이 예쁘네.

여자는 걷는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동작을 반복한다. 가끔씩 들리는 새소리와 여자의 신발이 땅을 스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간다.


여자는 걷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두껍게 깔린 구름을 배경으로 뒤에 숨은 태양은 평소에는 허락하지 않던 마주 보기를 허락한다. 여자는 구름 뒤에 가려진 은빛 태양을 쳐다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평소에는 쳐다볼 수 없는 태양을 응시한다.


순간 멀리 까악 하며 거칠게 내뱉듯 우는 까마귀 소리와 푸드덕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가 여자의 주위를 환기시키자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제법 멋스럽게 만들어진 편평한 돌이 있다. 그런 돌 일고여덟 개가 시냇물을 가로지르며 징검다리를 만든다. 여자는 그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뛰어 건넌다. 평소 같으면 넓은 곳을 흐르던 시냇물이 징검다리 사이사이 좁은 곳을 지나며 물방울들을 공중으로 흩뿌리고 꽤 요란하게 물 흐르는 소리를 내며 여자를 따라올 텐데 최근 몇 달간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물소리도 사라졌다.


여자는 줄곧 앞만 보며 걷는다. 몇몇 사람들이 여자를 스쳐 지나간다. 여자는 계속 걷는다. 걷다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잠시 멈춘다.


굵은 지렁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나와 콘크리트 옹벽 쪽으로 꿈틀거리며 기어간다.

여자는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 근처 지푸라기 하나를 주워 들고 포장된 산책로를 기어가는 지렁이 아래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지렁이 몸의 절반이 지푸라기에 걸쳐진 순간 지렁이를 들어 올려 지렁이가 기어 나왔던 풀숲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잠시 멈칫하더니 꿈틀거리며 땅속으로 파고드는 지렁이를 보며 여자는 생각한다. 혹시 나도 눈먼 지렁이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지렁이가 흙이 없는 옹벽을 향해가는 동안 혹시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면 얼마 가지 않아 지렁이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지렁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콘크리트 옹벽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을 때 여자의 귀에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처럼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들린다.

“예쁘네. 참말 예쁘네.”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을 심하게 떨며 구부정하게 서 계신 어르신이 여자를 쳐다보며 중얼거리고 있다. 마스크 사이로 가려진 입이 약간 벌어진 듯 그 소릴 들은 여자의 눈이 웃는다. 그러자 어르신은 땅에 지팡이를 댄 채 여자가 들으라는 듯 더 큰 소리를 낸다.

“예쁘네. 참말 예뻐.”

여자는 실실 웃으며 어르신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걷는다. 그런데 걸어가는 여자 뒤통수에 대고 어르신이 다시 입을 연다.

“참말 예뻐. 볼록하니 솟은 젖이 예뻐.”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멈칫한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린다.


몇 주 전, 유채꽃이 핀 길을 여자가 걷고 있었다. 여자의 키 높이만큼 자란 유채꽃밭 사이에 자리 잡은 산책로를 걷는 여자는 미풍에 흔들리는 유채꽃을 보며 봄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온통 노랗게 흐드러진 꽃들은 살랑거리며 꽃을 찾아드는 벌을 유혹하듯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여자도 그 유혹에 빠져 걷고 있을 때 그 어르신을 처음 보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채 눈만 내놓고 걷는 여자를 보며 그때도 예쁘다고 말했다. 여자는 어르신을 보며, 연세가 있으신 것 같은데 치매인가?라고 걱정을 하며 걸음을 늦춰 걸었다. 그때 앞에서 눈치 보고 있던 다른 사람이 여자에게 수군거렸다.

“영감이 노망이 났는가 봐요. 아무 여자나 보고 예쁘다고 수작 부리는 것이. 쯧쯧쯧.”

그래서 여자는 치매는 아닌가 보다 하고 유채꽃 사이로 걷는 걸 계속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여자는 뒤돌아 다시 어르신께 다가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뭐라고? 잘 안 들려.”라고 말하는 어르신에게 몇 번을 물어 80세가 넘었다는 대답을 얻어낸 여자는 어르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어르신, 예쁘다는 이야기는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하신 말씀 있잖아요. 그런 말씀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하면 경찰서에 잡혀갑니다. 그러니 꼭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면 예쁘다는 말씀만 하세요. 친정아버지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어르신의 눈동자가 처음에는 불안으로 흔들리더니 서서히 물기가 번져간다. 그러더니 따뜻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아... 고마워.... 고마워.... 그런데 동그랗게 웃는 눈이 이쁘네.”

그러자 여자가 자신보다 키가 작은 어르신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는다.

“네. 어르신 눈도 동그랗게 예뻐요. 앞으로 이렇게 예쁘다는 말씀만 하셔야 돼요. 꼭이요.”

그렇게 몇 번을 다짐한 여자는 뒤로 돌아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걷는다.

여자의 발소리가 또렷이 울리는 그곳에서 어르신도 양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휘청거리며 반대쪽을 향해 소리 없이 걷는다.

얼마 뒤, 구름 뒤에 숨어 있던 태양이 고개를 살짝 내밀어 각자의 길을 걷는 두 사람의 어깨에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태양은 생각한다. 지렁이, 여자, 어르신,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혹시 그들이 벽을 만나면 비추는 건 해주겠다고.....

그런데 구름이 낀 날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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