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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asam Oct 10. 2022

두 개의 뮤직박스


 <봄>

 아침 찬바람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마루에 앉아 실눈을 뜬 채 잠을 털어냈다. 눈길이 머무는 곳에 아버지의 나무지게가 보인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새벽부터 아버지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해다가 소외양간 옆에 받쳐 놓았다. 지게 위에 진달래꽃 몇 가지가 보인다. 활짝 핀 꽃은 서너 송이뿐, 연분홍빛을 잔뜩 머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탱탱하게 부푼 꽃봉오리가 대부분이다. 잠에서 덜 깬 채 비틀거리며 지게 앞으로 걸어갔다. 활짝 핀 꽃잎이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앞산 뒷산 자락에 연분홍 물결이 넘실댄다.


<늦은 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논에 모심기를 하는 날이다.  나는 못줄을 잡고 품앗이 일꾼들을 포함해 우리 식구들까지 열서너 명이 줄을 맞춰 모를 심는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머니가 점심밥을 내오셨다. 논둑에 둘러앉아 박으로 만든 박 바가지에 하얀 쌀밥을 말은 고깃국 한 그릇씩 들고 앉았다. 비계가 잔뜩 붙어 있는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무,  대파와 함께 끓인 고깃국이다. 빨간 국물 위에 돼지고기 기름이 연못의 수련처럼 둥둥 빼곡하게 떠 있고 기름방울 사이에서 실안개처럼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기름진 고깃국 한 사발에 뱃속이 따뜻해지니 비를 맞아 촉촉하게 젖은 옷에 온기가 돈다.

      

<이른 여름>

 하얀 별처럼 생긴 감꽃이 밤사이 땅바닥에 ‘톡 톡’ 떨어져 내린 날이면 친구들과 쪼그려 앉아 감꽃을 주웠다. 꽃이 대바구니에 가득 차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되고 하얀색 실로 꽃을 꿰어 연결하면 묵직하고 향기로운 목걸이가 된다. 감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골목길을 걷노라면 햇살은 담벼락에 하얗게 부서지며 길을 밝힌다.

            

<여름>

 아버지가 아침부터 수박과 참외, 오이와 토마토 등 야채와 과일을 따서 리어카에 싣는다. 4킬로미터 떨어진 면소재지에 있는 장터에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아버지는 장에 내다 팔 물건을  준비하고 장터까지 운반하는 일을 한다. 어머니는 장터 국밥집 앞에 터를 잡고 온종일 물건들을 판다. 우리 형제들을 먹이고 키우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는 등이 휘게 일을 한다. 


 마을에서 100여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우리 수박밭이 있고 밭머리에 아버지가 짚을 엮어서 만든 원두막이 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다. 노는 날에는 아침부터 원두막으로 출근을 한다. 원두막은 나의 놀이방이 되고 장에 간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는 곳이며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곳간이다.       

 수박밭에 들어가서 다 익었다 싶은 수박을 검지손가락으로 힘 있게 튕겨 본다. ‘텅 텅’ 소리 나는 것은 안 익은 수박이고 ‘툭 툭’ 소리가 나는 것은 잘 익은 수박이다. 아침에 아버지가 장에 내다 팔기 위해 잘 익은 수박을 모조리 땄기 때문에 ‘텅 텅’ 소리 나는 수박이 대부분이다. 밭 전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닌 끝에 ‘툭 툭’ 둔탁한 소리가 나는 수박 한 통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잘 익은 수박이다. 아버지가 참외밭에서는 실수를 안 하셨다. 언뜻 보면 다 익은 노란색 같지만 자세히 보면 푸르뎅뎅한 색이 섞여 있는 참외들이 햇빛에 힘을 잃어 땅에 바싹 달라 붙은 가지들 사이로 널브러져 있다. 긴 여름날의 뙤약볕에 반나절이면 샛노랗게 익고도 남을 참외들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무렵, 잠에서 깬 나는 꿀벙어리가 되었다. 낮잠을 자는 사이 꿀벌이란 놈이 입 언저리에 묻은 수박의 단물을 빨아먹다가 침을 쏘고 달아나 버렸다. 얼굴의 반쪽이 퉁퉁 부어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장을 마친 어머니가 국화풀빵을 사 오셨다. 내가 좋아하는 풀빵 앞에서 나는 심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웃어야 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날, 오이밭에 들어가면 헉헉 숨이 막힌다. 땅에서 진한 흙냄새가 훅 올라온다. 오이 한 개를 따서 바지에 슥슥 문질러 잔 가시를 제거하고 입으로 베어 물면 ‘탁’ 하고 오이 부러지는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상큼한 향이 코와 입으로 퍼진다.      

 토마토 밭이랑을 지날 때 옷깃에 스친 토마토 가지가 반항하듯 특유의 냄새를 토해낸다. 그 냄새가 토마토보다 더 좋다고 생각되어 일부러 토마토 가지를 건드리면서 걸었다. 토마토 한 개를 손으로 잡고 힘을 주어 비틀면 ‘후둑’ 하고 떨어진다. 입이 터져라 크게 벌려 토마토를 베어 물면 진하고 뜨끈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찼다가 덩어리와 함께 목으로 꿀꺽 넘어간다. 입 밖으로도 빨간 즙이 넘쳐 나와 턱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린다. 토마토즙이 묻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 이마에도 빨간 토마토 물이 든다.      


<가을>

 물감을 덧칠한 듯 두꺼워진 구절초 하얀 꽃잎들이 서늘한 바람 속에 향기를 흩뿌린다. 시냇물은 한층 더 또랑한 소리로 낙엽송 뿌리를 적시며 흐르고 풀벌레들도 온 힘을 다해 밤낮으로 영혼의 노래를 부른다.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답고 서러운 이 땅의 생명들은 겨울을 위한 갈무리로 분주하다. 산꼭대기에서 서늘해진 갈바람이 단풍과 구름과 옅어진 햇살을 몰고 내려온다. 찬란한 가을이다.          


<겨울>

 텅 빈듯하지만 가득 차 있고 모두가 떠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떠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오래되어도 끊임없이 생명 내고 해와 달이 오래되어도 빛이 날로 새로울 수 있는 것은 겨울의 덕이다. 땅 밑 어두운 곳에 숨결 같은 온기를 꼭 붙잡고 다시 올 봄을 위한 휴식과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위대한 겨울이다.      


<다시 >

 시냇물이 돌돌돌 소리 내며 흐르고 버들강아지 하얀 솜털에 윤기가 잘잘 흐른다. 산수유 가지가 기지개를 켜며 겨울을 툴툴 털어낸다. 겨울이 앉았던 가지마다 새살이 돋듯 노란 꽃이 솔솔  피어난다. 다시 봄이다.       


<그리고.. 지금>

  옛 시인들은 세월의 무상함을 시를 지어 노래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다’라고 90여 년 전에 이은상님이 시를 지었고 500여 년 전 황진이는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라는 시를 지었다.


애끓는 사랑으로 우리를 키워내셨던 부모님과 먹을 것 갖고 다투고 남들과 싸울 때 편들어 주던 형제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이 세상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정답던 친구들과 고단한 삶을 억척같이 살아내던 이웃 사람들도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고향은 뮤직박스 같은 것이다. 뚜껑을 살짝 열기만 하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뮤직박스. 고향의 사람들과 빛나고 푸르른 바람, 맛과 냄새들은 열일곱 살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뮤직박스에 담겨 있다.  


교직 생활 40년이  두 번째의 고향으로 뮤직박스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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