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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asam Oct 10. 2022

프리즘


 온순, 겸손, 이해심, 긍정, 원만, 인사성, 명랑, 사교, 친절, 쾌활, 의욕, 모범, 활기, 적극, 자기주장, 자기 주도, 자존감, 진취, 유머 감각, 논리, 창의, 이해, 성취도, 의지력, 사고력, 탐구력, 관찰력, 상상력, 감수성, 언어구사, 배려, 이해, 양보, 공손, 봉사, 이타심, 존중, 자율, 협력, 품행, 책임, 정의, 성실, 의리......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날까지 학교생활기록부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란에 빼곡하게 나열되는 낱말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낱말을 이리저리 배열해서 만든 문장일지라도 특별함이나 새로움은 이미 찾아볼 수 없다. 시대가 변했어도 생활기록부의 양식이나 기록 방법에서 전통을 고수한다는 일은 점은 참으로 놀랄 일이다. 

     

 누가 보아도 모범적이라고 생각되는 학생들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학급의 몇 퍼센트에 속하는 무채색을 띤 학생들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꽤 어렵다. 흰색처럼 존재감이 없는 조용한 학생들이나 검은색처럼 부정적인 특성을 가진 학생들, 다시 말해 일당백의 존재감 넘치는 학생들의 특성을 문장으로 나타낼 때는 낱말의 궁핍함을 경험하게 된다.      

 ‘길동이는 생각을 자신 있게 표현하나 논리와 어휘력이 부족함이라고  것을 ‘길동이는 생각을 자신 있게 표현하나 논리와 어휘력 향상이 요구됨으로 표현하거나 ‘길동이는 생각을 자신 있게 표현하나 독서를 통하여 논리와 어휘력 향상에 힘쓴다면  발전이 기대됨등의 말장난을 하기 쉽다.  


 ‘머리는 없으나 달리기는 잘함 예전에 어떤 교사가 작성한 ‘행동특성  종합의견이다. 이것을 작성한 교사는 눈에 보이는 것과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작성하였을 것이니 현재의 교사들처럼 전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성의 없고 감동이 없는 낱말들의 나열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지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문장의 어미를 ‘형편없음, 문제 있음, 문제가 많음, 심각함등의 끝맺음으로 완성한다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완성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눈으로 관찰한 행동이나 성격, 교우관계, 학습 능력만으로 한 사람의 특성을 몇 개의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학생을 기만하는 일일 수도 있다. 모범적인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어떻게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으며 몇 개의 문장으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피상적인 관찰 결과만으로 학생들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란을 채운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일이다. 더구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이라는 것이 대학 입시와 결부된다면 더욱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일이다


 모범적이라고 생각되는 학생이나 그렇지 않은 학생의 특성을 기록한 문장을 살펴보면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 두리뭉실한 문장들은 한마디로 온기와 감동이 없다. ‘신은 인간에게 공평한 능력을 주었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마다 한 가지 정도는 빛나는 보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모든 것을 다 잘한다거나 모든 것을 다 못하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 '세상에 나쁜 학생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방울을 통과한 무채색의 빛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빨주노초파남보 색들을 하늘에 펼쳐 놓는다. 어두운 땅 속에 숨어있는 연녹색 여린 순이 땅 위에 올라와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듯 내부에 존재하는 빛은 분명히 존재한다. 교사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잣대를 버리고 프리즘의 역할을 통하여 학생 개개인의 깊은 내면에 감춰져 있는 순수하고 선명한 색깔들을 마법처럼 끌어올려야 한다. 

 

 시간과 환경 등 교육여건의 획기적인 변화가 뒷받침되어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란을 기록해야 하는 이 땅의 교사들이 당면하게 되는 깊은 고민이 해결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언어의 궁핍함 없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속 시원하게 부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란이 일필휘지로 채워질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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