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아침 찬바람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마루에 앉아 실눈을 뜬 채 잠을 털어낸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새벽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해오셨다. 외양간 옆에 받쳐 놓은 나무 지게 위에 진달래꽃 몇 가지가 보인다. 활짝 핀 꽃은 서너 송이뿐, 연분홍빛을 잔뜩 머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탱탱하게 부푼 꽃봉오리가 대부분이다. 잠에서 덜 깬 채 비틀거리며 지게 앞으로 걸어간다. 활짝 핀 꽃잎이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다. 며칠이 지나 앞산 뒷산 자락에 연분홍 물결이 넘실댄다.
<늦은 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 모심기를 한다. 품앗이 일꾼들을 포함해 우리 식구들까지 열서너 명이 줄을 맞춰 모를 심는다. 나는 못줄 잡는 담당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머니의 점심밥이 도착한다. 논둑에 둘러앉아 박으로 만든 박바가지에 고깃국에 하얀 쌀밥을 말아 한 그릇씩 들고 앉아 먹는닥. 비계가 잔뜩 붙어 있는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무, 대파와 함께 끓인 고깃국이다. 빨간 국물 위에 돼지고기 기름이 연못의 빼곡한 수련처럼 둥둥 떠 있고 기름방울 사이에서 실안개처럼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기름진 고깃국 한 사발이면 비를 맞아 촉촉하게 젖은 옷에 온기가 돈다.
<이른 여름>
하얀 별처럼 생긴 감꽃이 밤사이 땅바닥에 ‘톡 톡’ 떨어져 내린 날에 쪼그려 앉아 감꽃을 줍는다. 꽃이
싸리바구니에 가득 차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하얀 실로 꽃을 꿰어 연결하면 묵직하고 향기로운 목걸이가 된다. 감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골목길을 걸으면 햇살이 담벼락에 하얗게 부서지며 길을 밝힌다.
<여름>
아버지가 아침부터 수박과 참외, 오이와 토마토를 따서 리어카에 싣는다. 4킬로미터 떨어진 면소재지에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아버지는 장에 내다 팔 물건을 준비하고 장터까지 운반하는 일을 한다. 어머니는 장터 국밥집 앞에 터를 잡고 앉아 온종일 물건들을 판다. 고된 일에 아버지 어머니 등이 휘어 가는 동안 자식들은 쑥쑥 자란다.
마을 가까이에 우리 수박밭이 있고 밭머리에 아버지가 만든 원두막이 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에 어김없이 들르는 참새방앗간 같은 곳이다. 나의 놀이방이고 장에 간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는 만남의 장이며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곳간이다.
아버지는 아침에 장에 내다 팔기 위해 잘 익은 수박을 따고 한 두 통은 우리를 위해 남겨 놓는다. 놀다가 허기가 질 때면 숨바꼭질을 하듯, 형사가 범인을 잡듯 종횡무진 수박밭을 누비며 수박을 찾는다. 덜 익은 수박과 푸르뎅뎅한 색이 섞여 있는 참외들은 다음 장날을 위해 긴 여름날의 뙤약볕에 잘도 익는다.
원두막에서 수박을 실컷 먹고 낮잠을 잔다. 꿈벌이 입술에 묻은 단맛을 빨아 먹고는 한 방을 쏘고 달아난다. 입 주변과 볼까지 퉁퉁 부어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사 온 국화 풀빵도 먹지 못하고 일그러진 쓴웃음만 짓는다.
태양이 따끈하게 데워 놓은 오이밭에 들어가면 숨이 헉헉 막힌다. 땅에서 진한 흙냄새가 훅 올라온다. 오이 한 개를 따서 바지에 슥슥 문질러 잔 가시를 제거하고 입으로 베어 문다. ‘탁’ 하고 오이 부러지는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상큼한 향이 코와 입으로 퍼진다.
토마토 밭이랑을 지날 때 옷깃에 스친 가지가 반항하듯 토마토 향을 토해낸다. 토마토 한 개를 손으로 잡고 힘을 주어 비틀면 기분 좋게 '툭’ 하고 떨어진다. 입이 터져라 크게 벌려 한 입을 베어 물면 진하고 뜨끈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찼다가 덩어리와 함께 목으로 꿀꺽 넘어간다. 입 밖으로도 빨간 즙이 넘쳐 나와 턱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린다. 토마토즙이 묻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 이마에도 빨간 토마토 물이 든다.
<가을>
하얀 물감을 덧칠한 듯 두꺼워진 구절초 꽃잎들이 서늘한 바람 속에다 마구 향기를 털어낸다. 시냇물은 한층 더 또랑한 소리로 낙엽송 뿌리를 적시며 흐르고 풀벌레들은 온 힘을 다해 밤낮으로 울어댄다.
산꼭대기에서부터 서늘한 갈바람이 나무마다 단풍을 들이며 천천히 내려온다. 찬란한 가을이다.
<겨울>
텅 빈듯하지만 가득 차 있다. 하늘과 땅이 오래되어도 끊임없이 생명 내고 해와 달이 오래되어도 빛이 날로 새로울 수 있는 것은 겨울의 덕이다. 생명의 씨앗들이 땅 밑 어둠 속에서 가녀린 숨결 같은 온기를 부여잡고 다시 오는 봄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위대한 겨울이다.
<다시 봄>
시냇물이 돌돌돌 소리 내며 흐르고 버들강아지 하얀 솜털에 윤기가 잘잘 흐른다. 산수유 가지가 기지개를 켜며 겨울을 툴툴 털어낸다. 겨울이 앉았던 가지마다 새살이 돋고 노란 꽃이 솔솔 피어난다. 다시 봄이다.
<그리고.. 지금>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옛 시인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했지만 내 고향이라는 뮤직박스 안에서
부모 형제, 친구들, 이웃들. 맛과, 냄새, 빛나고 푸르던 바람들은 여전히 제 빛을 잃지 않고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