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얘, 너 바지 뒤집어 입었잖아."
"상관없어. 내일이면 똑바로 돼"
거실에서 바지를 뒤집어 입고 다니던 아들이 명언을 남겼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벗을 때에 겉과 안이 다시 바뀔 테니 내일은 제대로 되겠네. 설마 밖에 나갈 때는 제대로 입고 나가겠지 하고 별로 신경을 안 썼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살살 신경 쓰이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세탁을 한 후 빨래를 널다 보니 티셔츠와 바지의 겉과 안이 뒤집어져 있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를 뒤집는다. 큰 빨래를 다 널고 보니 세탁 바구니 밑에 깔린 양말이 대부분 뒤집어져 있다. 바지와 티셔츠는 백번 양보해도 도대체 뒤집힌 양말은 참기 어렵다. 그 수가 너무 많다.
내 속이 먼저 뒤집어지고 양말이 내 손에 뒤집어진다.
문제는 고물고물 병아리새끼들처럼 앙증스럽게 뭉쳐 있는 양말짝들이다. 뒤집을 때 끝까지 쭉 당기지 않고
발뒤꿈치 부분에서 벗을까 말까 하다 벗은 것 같은 동그랗게 말린 양말이다. 이쯤 되면 속이 아니라 머리가 아프다. 일단 뭉쳐 있는 양말을 길게 편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뒤집는다. 세탁은 제대로 되었나
걱정이 된다. 내기 몇 년 전부터 혈압약을 먹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잔소리만 해댔는데 오늘은 내 입에서 침이 섞인 큰소리가 로켓처럼 아들에게 날아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거대한 직격탄이다.
“옷이고 양말이고 벗을 때 조금만 신경 쓰면 제대로 벗을 수 있는데 그거 하나 못해? 중학생이면 이제 변할 때도 됐잖아. 어떻게 하는 짓이 네 아버지랑 똑같아?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뭘 할 수 있겠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 앞으로 누가 네 마누라가 될는지 참말로 걱정된다.”
어느 날인가. 소 귀에 경을 안 읽어도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급하게 모임에 나갔다 와서 스타킹을 벗는데 한쪽을 뒤집어 신은 것이 아닌가. 폼생폼사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이 일은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뒤집어 신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뒤집어 신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더구나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세상은 알고 보면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양말을 뒤집듯 생각도 한 번 뒤집어 보자'
세상에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깟 빨래 가지고 이토록 신경을 썼단 말인가. 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빨랫감을 빨래통에 넣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 아닌가? 그래도 밖에 나갈 때는 제대로 하고 가지 않는가? 그 후로 뒤집어진 빨래는 뒤집어진 대로 널고 마르면 뒤집어진 대로 개서 서랍에 넣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산다는 일은 문제의 연속이다.
문제가 또 생겼다. 옷을 개는 일이다. 옷을 보기 좋게 개어 놓으면 아래 옷을 뺄 때 위에 개어 놓은 옷이 흐트러진다. 또 개고 흐트러지고 또 개고......
때마침 TV홈쇼핑에 100장 1세트에 49,900 하는 초간단 옷 접기 폴더를 팔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 거지!'
분홍색과 하늘색이라 더욱 맘에 들었다. 수량은 100장이어서 집 안의 옷을 나름대로 가늠해 보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49,900원을 일시불로 결제를 했다.
초간단 옷 접기 폴더는 마법처럼 옷을 정리할 수 있어서 서랍 속과 집안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 TV홈쇼핑에서 100장 1세트에 49,900 하는 초간단 옷 접기 폴더를 산 것은 신의 한 수였어.'
자화자찬하며 행복해하던 며칠 후에 문제를 발견했다. 아들이 외출한 뒤에 분홍색과 하늘색의 폴더가 침대 위에, 방바닥에, 서랍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폴더에서 옷을 벗겨 입고 그냥 던져두고 간 것이다.
'오 마이 갓!'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
대한 결심을 했다. '초간단 옷접기폴더'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리기로 했다. 그놈의 49,900원이 걸리기는 했지만 눈 질끈 갚고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재활용 수거장에 내다 버렸다. 폴더는 하루 안에 다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오며 가며 몇 장씩 집어 갔다. 그 후에 몇 장은 쓰레기 관리하는 아주머니께서 매직으로 글씨를 써서 알림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비닐을 통째로 넣지 마세요' 나 '베개나 헌 이불은 수거함에 넣지 마세요' 등. 그렇게나마 49,900원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니 약간의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죽으란 법은 없다. 뜻이 있는 길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드디어 해결책을 찾은 것 같다.
전에 사놓은 '2단 서빙 카트'가 새롭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앞으로 실행하게 될 기막힌 아이디어에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이름은 남대문 가판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찾아보기표에 또박또박 '상의' '하의'라는 글자를 써서 2단 서빙카트 상단과 하단에 붙였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서랍장에 있는 옷을 빼서 남대문 가판대에 얹었다.
옷 주인에게 공지도 했다
"엄마 내 파란색 티셔츠 어디 있어?"
"남대문 시장에 가봐. 위쪽 가판대"
"엄마 내 자전거 모자 어디 있어?"
"그것도 위에 사용하는 것이니 위쪽 가판대에 있겠네."
외출복 몇 개를 제외하고 운동복이나 여름 티셔츠 반바지 등은 남대문 가판대에 보관하니 완전 딱 좋았다.
오랫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게까지 생각되었다. 빨리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실제 그 뒤에 아는 사람들에게 말을 했지만 내 말을 듣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흥, 그러거나 말거나)
옷이 뒤집어졌다거나 흐트러졌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지거나 내가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만 자리를 옮겨서 사물이나 상황을 바라보면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10분 동안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 방법을 못 찾으면 그것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라고
세상의 문제는 썰물과 밀물 같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저 문제가 밀려온다.
장갑이나 손수건, 이런 것은 위 쪽에 넣어야 하나 아래쪽에 넣어야 하나?
4단이나 5단 카트를 마련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간에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