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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영 Oct 22. 2022

마스크? 마스크!

단편소설

- 딩동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배달이 잘못 왔나?‘

12시가 막 지나가는 때였다. 선영은 여느 토요일 오전과 다름없이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줌으로 하는 화상강의가 끝나가고 있었다. 비대면 모임의 활성화는 그나마 코로나가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 있는 한 인문 고전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이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확대되었다. 덕분에 전국라인을 넘어 해외 거주자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마침 선영이 강사에게 질문을 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는 강사 분에게 귀 기울이느라 그녀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이 던진 질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 딩동

또 초인종이 울렸다. 선영은 컴퓨터 모니터의 음소거를 눌렀다. 줌 수업의 특성상 각자의 환경에서 생겨나는 생활소음을 단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사의 말과 뒤섞여 다른 수강생들에게 민폐가 된다. 

'누가 자꾸 이러지?'

모니터 속에서 강사는 계속 얘기하고 있었고 선영의 마음은 초조했다. 답변이 얼추 마무리 되는 듯하여 전화기를 보았다. 같은 이름의 부재중이 몇 개 와 있다. 태선이었다. 

‘앗, 얘가 왔나? 갑자기 웬일이지?’

드디어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고 다음 수강생의 질문이 이어졌다. 선영은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태선이가 검은 봉지를 들고 승강기와 현관문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 태선아! 네가 여기 웬일이야? 우리 내일 볼 거잖아?

태선은 G시 시내에 살았고 선영은 외곽에 있는 G시 변방에 위치한 J읍에 살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한 지나치면서 만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 언니, 강의 끝났죠? 의령 가는 길에 여기 00만두가 맛있다고 해서 언니 생각나서 주고 가려고요, 왜 전화를 안 받아요? 

태선은 선영이 매주 토요일에 하는 수업을 알고 있었다. 12시쯤 끝난다고 들은 것 같아 들렀다고 했다.

- 아……. 그랬구나. 수업은 끝났는데 조별 모임까지 하면 1시쯤 끝나.

  이거 주려고 일부러 들렀어? 너무 고맙네.

- 아, 아직 안 끝났구나. 내가 현관문 고리에 걸어두고 갈걸 잘못했네. 식기 전에 맛보라고요.

- 아냐 아냐, 너무 고맙지. 네 마음이 따뜻해서 더 맛있겠다야.

오글거리는 멘트들을 남발하며 선영은 한껏 고마움을 표시한 후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선영이 속한 조 조원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영은 즐거운 마음으로 조별 토론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이었다. 일요일이지만 선영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전에는 한 달에 한 번 하는 고전읽기 모임이 잡혀 있었다. 오후에는 부산에서 E 작가가 하는 글쓰기 관련 강연이 있었다. 평소에 관심 있는 작가였기에 한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고전 읽기 모임은 가벼운 소설 위주로 읽으면서 책을 매개로 놀고 싶어 그녀가 지인들을 모아 만든 모임이다. 문학작품 속 인물에 대해 각자의 생각들을 나누는 자리는 유익하고 재미나다. 처음 시작할 때 읽고 싶은 책들을 추천 받았다. 

첫 해에는 멤버들이 제안한 책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제안한 순서대로 연말까지 커리큘럼도 만들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여성문제에 관심 있는 분이 S.B의 0000을 제안했다. 선영도 별 생각 없이 이번 참에 보자 싶어 커리에 넣었다. 하지만 막상 읽으려니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심오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실존주의 철학 등 여러 사상들이 베이스를 이루는 동시에 여러 갈래로 뻗쳐있는 무게감 있는 고전이었다. 독서력의 차이에 따라 읽어내지 못하는 멤버가 속출하였다. 선영은 남순 선생님께서 얼마 전에 이 책을 번역자와 함께 읽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녀가 평소에 따르는 선생님이었기에 잘 되었다 싶어 이번 시간에 함께 해 달라고 초빙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사람은 모셔놓고 멤버들은 못 읽겠다 하고, 선영은 난감했다.      


지난 7월에는 남순 샘마저 사정상 함께 할 수 없었다. 요약해 올 분량을 서로 나누었지만 멤버들은 끝내 읽지 못했다. 선영이 준비해 온 제 1장의 요약문을 읽으며 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녀가 맡았던 부분의 내용이 다소 원론적이어서 어렵고 지루했다. 각자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선영은 8월에도 계속 할 건지를 멤버들에게 물었다. 읽어내지 못하는 책을 굳이 힘들게 끌고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외부인을 초청하는데 준비 없이 모실 수는 없었다. 재숙 샘과 보영은 얼씨구나 하며 넘어가자고 했다. 특히 보영은 한 달 내내 책을 끼고 다니면서 마음만 무거웠다고 했다. 재숙 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영도 그러고 싶었다. 마음을 내면 읽기야 하겠지만 그녀에겐 지금 당장 봐야 할 다른 책들이 과제처럼 밀려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페미니즘이 현재 그녀의 관심분야도 아니었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패스하는 쪽으로 결정하려는 찰나, 태선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선영이 물었다.

- 태선이는 이 책 계속 하고 싶어?

기다렸다는 듯이 태선이 대답했다.

- 굳이 책은 못 읽어도 남순 샘 얘기 듣는 시간은 가지고 싶어요. 우리보다 지성이 뛰어난 분은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 책을 읽지 않고 사람을 모시는 건 좀 그런데…….

- 그래두, 읽고 안 읽고 떠나서 선생님 얘기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잖아요.

태선이가 강력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읽지는 못해도 듣기는 하겠다는 태선의 생각에 선영은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떡할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서 선영은 나머지 두 멤버들과 다시 눈길을 마주하였다. 

- 쌤들은 어떠세요?

- 저는 뭐……. 꼭 하자, 하지 말자, 이런 건 아니에요.

- 저도요.

- 그럼 8월에 예정된 부분까지만 하도록 해요.

그제야 태선이 빙긋이 웃었다. 선영은 다소 언짢았다.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태선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좀 물러서도 좋지 않아? 꼭 저 하고 싶은 대로 끌고 가기는……. 다 힘들어 하면 접을 줄도 알아야지.'


어느덧 8월 모임 날이었다. 선영에겐 모임의 주최자라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리고 모시는 선생님에 대한 예의도 중요했기에 그동안 꾸역꾸역 1권까지 읽어냈다. 나름대로 어젯밤 늦게까지 쓰기를 완성한 발제문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좋은 사람들과의 좋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딩동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들어왔다.

- 언니, 코로나로 언니 집에서 하는 게 영 불편하면 다음엔 스타디룸에서 해요.

자리에 앉자마자 태선이 선영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얘 또 시작이네…….‘

별거 아닌 거에 한번 씩 태클을 거는 태선이가 선영은 피곤했다. 

선영은 불편한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 태선아, 내가 얘기한 건 장소가 아니라 마스크 문제였어. 마스크를 쓰면 장소는 어디건 상관이 없어. 

    

아침에 선영이 단체 채팅방에 한 얘기를 태선이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선영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 선생님들~ 오늘은 간식 챙겨오지 마세요, 마스크 쓰고 할게요. 코로나가 요즘 또 수상혀요~.

- 점심은어쩌고요.

평소 문자에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태선이 특유의 말투이다. 

- 재숙쌤 오후에 일정 있다고 했으니 물어봐서 되는 사람끼리 식사하면 되지.

한 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영은 바로 알아차렸다. 태선은 어차피 밥 먹을 땐 마스크 벗지 않느냐는 항변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주는 밀도감으로 인해 선영은 태선의 말 속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짐짓 모르는 척 진짜 점심에 관해서만 답했다. 그때도 선영은 얼핏 피로감을 느꼈다.     

모임 장소는 선영의 집인 동시에 그녀의 일터였다. 혼자 살면서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였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부터 극도로 조심했었다. 애들로부터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선생으로 인해 애들이 감염되면 안 된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실제로 코로나가 처음 시작된 2020년부터 2년 동안은 외식이나 커피숍 등 다중이용 시설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3월, 전파력 강한 오미크론은 그녀도 피할 수 없었다. 학생에게서 감염되어 1주일간 휴원하였다. 무증상으로 무사히 지나갔지만 막상 일을 쉬고 보니 경제적인 타격이 컸다. 자영업의 특성상 하루 쉬면 하루만큼의 수입이 줄어든다. 공부방도 일주일만큼 원생들의 회비를 차감해 주어야 한다. 백단위의 생활비가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했다. 그 뒤로 코로나도 차츰 잡혀가는 듯하였다. 야외에서 마스크 제재가 없어지는 등 분위기가 바뀌어 가자 선영도 조금씩 자유로웠다. 하지만 8월이 되면서 이노무 코로난지 뭔지가 다시 스멀거렸다. 원생들 중에 가족 감염으로 결석자들이 생겨났다. 매일 오는 안내 문자의 확진자 수도 증가하였다. 1주일에 한 번 가는 도서관 수업에서도 간식 금지 지침이 내려졌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재확진 시기에는 서로가 다시 조심해야겠다 싶어 선영이 올린 글에 태선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던 거다.     


'얘가 마스크 쓰기 싫어하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모임장소 운운하는 그녀가 선영의 신경에 거슬렸지만 모임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남순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친절한 설명, 그리고 따뜻한 태도에 모두 감동 받은 듯 했다. 선영은 좀 따분했다. 남순 선생님이 풀어내는 내용이 그녀에게는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너무 길었다. 하지만 나머지 멤버들에겐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멤버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품어온 페미니즘에 관련된 질문들을 마음껏 쏟아내도록 약간 관조적 자세로 물러나 있었다. 더 간절한 사람에게 시간은 충분히 양보할 수 있다. 선영이 준비해 온 석장 분량의 발제문을 토대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점심도 간단히 배달음식으로 때웠다. 식사를 함께 했지만 선영은 음식 먹을 때가 침 튀기며 토론할 때 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먹는 동안은 당연히 말수도 줄어든다. 2시가 넘어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에 끊기가 애매해서 묵묵히 듣고 있었다. 2시 30분쯤 드디어 모임이 끝났다. 남순 선생님께 고마워하며 정말 좋았던 시간이었다고 만족해하는 멤버들을 향해 태선이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 이것 봐, 안했으면 어쩔 뻔 했어!

모두 돌아간 후 선영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던 물체들과 숨결이 스쳐간 공기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독했다. 그리고 서둘러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 약속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태선의 전화가 왔다. E 작가의 강연 내용이 궁금해서일 거라고 선영은 짐작했다. 은근히 짜증이 났다. 오전 모임에서 아슬아슬하게 불편했던 지점을 분명 서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강연 내용을 자세하게 전달하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들을 덧붙여 풍부한 대화가 오갔을 거였다. 하지만 선영은 둘 사이의 문제는 외면하고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자 하는 태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강대강 생각나는 대로 몇 마디만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먼저 꺼내었다.

- 마스크를 오늘 다 안 써서……. 다시 단톡에 얘기하긴 그렇고, 네 생각은 어때?

- 언니가 영 불편하면 민감한 시기에는 모임을 쉬어가는 게 어떨까?

예상치 못한 답변이 태선에게서 나왔다.

- 태선아, 안 그래도 오늘 모임 시작하자마자 네가 장소 운운하기에 네가 제일 불편해가는 거 같아 얘기 꺼낸 거야. 코로나로 모든 사회생활을 끊을 순 없잖아. 모임을 보류하는 건 다른 문제야.

- 언니, 난 누가 시키면 하기 싫더라. 

- 이건 시키는 게 아니잖아. 내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배려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지. 

- 언니는 그냥 마스크만 쓰면 되는데 무슨 문제될게 있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선영은 답답했다. 태선이 말마따나 그냥 마스크 쓰자는데 왜 이렇게 사정하듯 이야기해야 하는지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계속 얘기했다.

- 그렇지! 불편해도 학생들은 다 쓰잖아, 어른들이 안 쓸 뿐이지. 학교에서는 선생이든 학생이든 모두 쓰고. 그리고 마스크는 원래 쓰는 게 맞잖아. 

- 다른 사람들은 뭐래?

- 아직 안 물어봤는데 다른 사람들 떠나 네 생각부터 말해 줘.

- 난 불편하던데.

태선이는 계속 자기 감정만 이야기했다. 마스크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때 선영은 그녀처럼 마스크가 절실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태선이처럼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직업 상 하루 종일 쓰고 있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상황이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마스크가 얼마나 절박한지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싶네.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그래도 다들 불편하다면 그때는 모임을 보류하는 방향도 생각해 봐야겠어. 나는 살아야 하니까. 개별 의견 듣고 수렴한 후에 결정해야겠다. 다시 물을께. 마스크 쓰는 거에 대해 너는 어떠니?

- 음……. 난 불편해.

순간 선영은 멍했다. 실내에서는 당연히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는 태선이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몰라서 안쓰는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마스크가 절실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상황을 강조하면서 배려해 달라고 한 번 더 부탁했다. 하지만 태선이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 끝까지 그녀의 감정에만 충실했다. 더구나 그녀 역시 얼마 전까지 교습소를 운영했기에 누구보다 선영의 상황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선영은 화가 났다. 불쾌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태선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선영은 애써 침착하게 전화를 끊었다.

- 알겠다.     


'옆 사람이 힘들다는데 자기 불편한 것만 생각해?

그래서 못 한다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독서를 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해?

저럴 바에 책은 뭐 하러 읽고 공부는 왜 한 대?

어떻게 주변에 대한 배려가 저렇게 없을 수 있을까?

저랑 나랑 사이에 그 정도의 배려도 못해주는 관계인가? 그런데 만두는 왜 사와?'      


집에 들어와 찬찬히 생각한 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당장 다음 달에 또 만나야 한다. 그 때 애매하게 마스크 얘기를 다시 꺼내기보다 지금 합의를 도출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맨투맨으로 상세히 얘기 할 필요가 있었다. 각자의 일상이 다른 만큼 습관도 다르다. 모든 사람이 선영과 같은 업종에 속하는 사람만큼 마스크가 절실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 몇 번의 사례를 통해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당연히 선생님은 애들이랑 함께 하니까 민감할 수밖에 없지요.

라고 공감해주는 듯 말하다가도 실제로 본인이 발언할 차례가 오면 말하기 답답하다고 냅다 벗어버리는 경우들을 종종 보아왔다. 선영은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사는데 말이다. 

먼저 오늘 참석했던 재숙 샘에게 전화했다.

- 쌤, 오늘 모두 처음엔 마스크 쓰고 있다가 음료 마시면서 자연스레 계속 벗고 있었잖아요, 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직업이라 그 부분이 민감한데 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글쎄요, 우리는 커피숍 등에서 자연스레 벗고 있으니까 별 생각 못했어요.

- 그런 건 사적 모임이구요, 걸려도 개인만 앓고 지나가면 되지만 저는 제가 걸리면 생업이 흔들려요.

- 그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 그렇다고 저를 위해서 써달라는 게 아니라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쓰는 게 맞지 않느냐는 얘기랍니다. 

- 쌤 얘길 듣고 보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원래는 실내에서 쓰는 게 맞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암묵적인 합의 하에 벗는 건데, 그 합의가 깨졌으면 쓰는 게 맞지 싶어요.

- 고마워요, 쌤.

- 아뇨, 주변에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없어 나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다음은 오늘 불참했던 보영에게 전화했다. 재숙 샘에게 했던 똑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 언니, 사실 제가 지금 코로나에 걸려서 참석 못했어요. 격리 기간은 지났는데 기침이 멎지 않아 민폐 될까 봐 안 갔어요. 저한테 감염되어 아는 언니도 걸렸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이번에 겪어보니 나만 생각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영은 이미 선영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경험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스크만 잘 쓰니까 한 집에 계신 어머니도 걸리지 않아 마스크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다고 했다. 이태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영은 현재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순 선생님께 전화했다.

- 선생님, 얘기 잘하셨어요. 당연히 써야죠. 제가 미안합니다. 학기 중엔 엄격하게 쓰다가 방학이라 저도 모르게 습관이 해이해졌어요. 미안해요.

거듭 사과할 뿐 아니라 선영이 전하고 싶었던 얘기, 공감 받고 싶었던 부분까지 바로 알아봐 주어서 그녀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에게 마스크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선영은 사람마다 생각이 이토록 다양하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새삼 다시 느꼈다. 한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받으니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맨투맨 인터뷰 결과 대부분은 마스크 쓰기에 동의했으니 태선이 혼자 안 쓰는 것 정도는 선영도 괜찮을 듯 했다. 불안함도 훨씬 줄어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코로나 상황 속에서 어떤 식으로 모임을 지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마스크를 쓰게 할 수 있을까라는 부분은 해결되었다. 사람살이는 사건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고 매듭지어지느냐에 따라 좋은 기억과 그렇지 못한 기억들로 시간은 채워진다. 남은 건 태선이와의 관계 문제다. 그 때 문득 선영의 뇌리에 남아있던 태선의 말이 떠올랐다. 

- 언니, 난 누가 시키는 거 싫어요. 그러면 더 하기 싫어져.

평소에 태선이가 선영을 아끼는 마음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마음은 말로 표현되는 게 아니다. 느낌으로 알 수 있고 태도로 드러난다. 태선이가 선영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건 결코 아니었다. 태선이가 지시받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거부하는 부정적 반응이 즉각 작동해서, 부탁이나 제안 또는 좋은 마음으로 살짝 전하는 조언들조차 지적이나 지시로 받아들이곤 하던 태선이였다. 그동안 서로 빚어냈던 몇 번의 잔잔한 마찰들을 떠올려보니 하나의 가닥이 잡혔다. 한 번씩 선영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볼 때도 있었다. 이유를 몰랐던 선영은 그럴 때마다 은근히 태선의 눈치를 보곤 했었다. 그런 것들 모두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하나의 줄기로 관통되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민감한 영역이 있다. 자기에게만 여린 살 끝이 불에 데듯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쳐지는 부분이다. 질겁하고 난 후에는 있지도 않은 난로에 화살을 돌리기도 하고 자기를 난롯가에 앉혀 놓은 그 누군가를 탓하기도 한다. 사실 아무도 자신을 난롯가에 데려 놓지 않았다. 뜨거울 거라 움찔했던 것도 실체가 아니라 따뜻한 난롯가 풍경이 담긴 그림일지도 모른다. 불이라 느끼면 뜨거울 테고, 그림이라 생각하면 감상할 테고, 아예 그냥 못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을 게다. 태선이에겐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녀 스스로 탐색해서 넘어서야 할 부분이다. 선영에게는 태선이에게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한 사람의 세상은 곧 하나의 우주다. 선영은 또 하나의 세상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믿음을 갖고 태선이를 그냥 지켜봐주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뿐했다. 만두를 사들고 찾아온 모습도 태선이고, 난 내가 하기 싫은 건 안 해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도 태선이다. 그냥 바라봐 주자. 나도 변하고 그녀도 변할 것이니까.      


다음날 저녁이었다. 빡빡한 하루 일정을 마치고 느긋하게 티비를 보려고 드러누운 선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태선이었다.

- 언니, 나 언니랑 불편한 사이 되는 거 싫어요. 자질구레한 일들로 안 보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 태선아, 네가 날 위한다는 거 잘 알아. 나 괜찮아.

-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투정 부리는 걸로 생각해 주세요. 나이가 들어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어제 언니가 몇 번이나 네 생각은 어떻냐고 물었는데 불편하다고 계속……. 

- 어젠 솔직히 나도 좀 황당하던데 문득 네가 한 말이 떠오르더라고,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진다던 말. 네 안에 그런 부분이 있더라고. 내가 올해에 토요일 공부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걸 느끼거든, 너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우리가 책 읽고 공부하는 건 성장하기 위해서잖아. 방향과 속도에 차이가 있을 테지만 누가 누굴 끌어주고 하는 건 또 아니잖아. 그냥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어. 

- 언니는 역시……. 공부한 것들이 삶으로 녹아드는 거 같고. 사실은 의령 가서 망개떡 보니까 또 언니 생각이 났거든. 만두 줬는데 또 들르는 건 오버 같았고, 암튼 생각은 났어요. 그런 게 내 마음인데 한 번씩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헤헤~

머쓱해 하는 웃음 속에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전화기 너머로 보이는 듯했다.

- 오~ 망개떡 맛있는데. 나도 작년에 의령서 사와서 냉동실에 쟁여두고 오래도록 먹었었어.

  참고로 난 만두보다 떡을 더 좋아한단다.

선영도 가볍게 응답했다.

- 오키.

- 이번 주 글쓰기 모임은 그럼 어떻게 할까?

- 삼계로 와요. 카페 비슷한 조용한 곳 있어요.

잠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태선이 황급히 말했다.

- 아냐, 원래대로 언니 집에서 해요, 그렇게 해요.

- 그래, 알겠어. 내가 이번 주엔 좀 피곤할거 같아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서 그래. 고마워.

전화를 끊고 선영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태선아, 이번엔 내가 삼계로 갈게. 새로운 공간에서 산뜻하게 보자.'

태선이의 이모티콘이 선영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태선이가 잔뜩 골이 난 목소리로 전화했다. 

- 언니, 전에 얘기했던 00공모전 있었잖아, 거기 100명 넘게 뽑았거든.

- 그래? 100명이면 해 볼 만 했겠네? 

- 근데 내가 안됐어! 아무리 그래도 100명인데! 

실망을 넘어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 너, 지난번에 그 글, 또 퇴고 안한 채 그대로 냈어?

- 어,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해서 그냥 냈어.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선영은 할 말이 없었다.     

‘아이고, 태선아...’     



202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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