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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닝커리어 Nov 09. 2024

전부 다 좋거나, 전부 다 나쁜

고등학교 위클래스에서 4년, 지금은 위센터에서 고객님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상담 중에 갑갑함이 올라와 상담자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많은 순간 중의 하나는 긍정적 자기개념이 전혀 없는 아이를 마주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야말로 자존감이 지하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아이들이지요.   

   

긍정적 자기개념은 자신을 유능하고 가치 있다고 느끼고, 그런 자신을 신뢰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이해 반해 부정적 자기개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무능하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기개념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연스레 형성되기 때문에 질적으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성장해 왔는지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양육자, 친구, 교사 등과 맺게 되는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고, 상담 장면에서는 내담자를 온전히 존중하는 태도로 만나고자 애쓰게 됩니다.     


이들을 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기 비하 수준이 아니라 회색빛 콘크리트로 덮인 자기혐오에 가깝습니다. 조금 비집고 들어가서 ‘너는 이런 것도 잘하잖아, 장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야.’라고 아무리 우겨봤자 수용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감각되지 않는 거지요. 어떤 대접과 피드백을 받았길래 저리도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린 시절 학교폭력의 피해 경험, 가정 내 돌봄 결핍 등의 복합적인 이슈들로 인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례도 있고, 평범한(?) 환경에서 무난하게 자라온 친구 중에도 이런 견고한 자기혐오에 갇혀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별 어려움 없이 보인다는 것은 단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오류를 품고 있기는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신을 저 정도로 싫어하지? 너무 심하잖아.

저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런 자기개념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머릿속에 물음표만 떠돌다가 정답을 찾지 못한 채 흩어집니다.     


제가 찾게 된 부정적인 자기개념 형성에 대한 요인은 첫째, 외모적인 부분입니다. 

외모의 비중은 거의 자기개념 파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부모로부터 안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거나 식구 중에 자신만 이상하게 생겼다고, 자신의 신체 중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친구들에게 너는 예뻐, 잘생겼어, 얼마나 멋진데라고 해 봤자 바로 튕겨 나오기 십상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외모가 준수한데도 저렇게 자신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생겨야 하는 거냐, 이렇게 생긴 나는 어쩌란 거냐’며 어설픈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요.      


너 얼굴에 왜 그렇게 여드름이 많이 났어?

키 크려면 더 많이 먹어야겠다.

그렇게 먹다가는 TV에 나오는 000(뚱뚱한 연예인)된다!     


혹여라도 아이들을 만났을 때 이런 얘기하시면 곤란합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시기에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아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비록 관심의 표현일지라도 극도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어서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자존감이 지하 깊숙이 있어서 숨고 싶은 아이들 마음을 모르고 자꾸 들쑤시고 물어보시면 힘들어해요. 어른들 중에 ‘그게 뭐 어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네, 차라리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게 낫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자랄 때처럼 그냥 막말 듣고, 때리면 맞고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요.      


언젠가 큰 딸아이의 머리털이 빗자루(^-^)라서 미용실 가서 매직하자고 몇 차례 얘기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조차도 아이를 틀에 가두려는 고약한 심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는 조심하고 있습니다. 제 기준으로 아이를 바꾸려고 하는 태도 자체가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 반증인 셈이지요. 머리 스타일에 대해 입을 대면서 ‘너를 있는 그대로, 지금 모습 그대로 사랑해’라고 하면 앞뒤가 다른 말을 하는 다중인격자인 셈입니다.      


외모에 집착하고 자기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코도 높이고 광대뼈도 깎으려고 돈을 모으는 친구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거지요. 어떻게 해도 거울을 보면 자기 얼굴 어디가 마음에 안 들고 균형이 안 맞는다고 불평하게 되고, 다시 뜯어고쳐야 할 다른 곳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외모의 막강 파워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얼굴이 곧 유리한 자산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상대의 태도가 외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보고 자랐는데 뭐 누구 잘못을 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 얼굴이 나의 가치를 매겨주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완전 부정하고, 신기루를 쫓는 것 마냥 외모와 몸매를 가꾸는 것에만 치중해서 자신의 마음 건강은 돌보지 못해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낮은 긍정적 자기개념의 두 번째 요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성격입니다. 자기의 전체가 다 못마땅 하지만 특히 싫은 소리 잘 못하고 혼자 짜증만 내고 분위기에 휩쓸리며 눈치 없이 따라다니는 것을 싫어합니다. 나름대로 성격을 바꾸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는 상처만 늘어날 뿐 지치기만 하니, 잘해보려는 의지는 점점 사그라들고 결론은 ‘이런 내가 살아서 뭐 해’, ‘차라리 죽고 싶다’로 이르게 됩니다. ‘나 같은 아이는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을 거야’라고 파국적으로 해석해서 누군가 다가가려 해도 쉽게 믿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성격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없어’라고 하면서도 

네가 먼저 인사 좀 해

너는 왜 그렇게 소극적인 거니?

그런 사소한 일에 삐치면 어떻게 하니?

왜 그렇게 이상하게 받아들여?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라고 쉽게 재단하는 소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요.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상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모양새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릴 적 크고 작은 외상으로 수치심과 좌절감, 죄책감 등을 형성하다 보면 스스로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요. 실수를 실수로 용납하지 못하고, 실수한다는 것은 끔찍한 실패로 간주되어 자신 또는 타인을 ‘전부 다 좋거나’ 혹은 ‘전부 다 나쁜’ 왜곡된 사고를 형성하게 되어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됩니다. 말실수할까 봐 대화에 끼지 못하고, 문자나 카톡이 와도 답장을 잘 안 하는 경우도 있지요.      



세 번째는 성적입니다. 공부를 못 해서 이후에 대학을 못 갈까 봐 걱정이고, 공부를 하는 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공부 못 하면 무능하다고 확신하지요. 

“야, 무능하다는 단어의 뜻을 잘 봐. 네가 무능하다면 지금껏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겠어? 무능이라는 단어가 너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믿습니다. 얼굴도 못생겼는데 머리도 나쁘고 친구들도 이런 나를 싫어하지, 이렇게 바보처럼 사는 게 싫으니까 차라리 누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학원에서도 모르는 부분을 여러 번 묻게 되면 선생님의 표정을 통해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모자란, 덜떨어진 사람이구나’를 학습하게 될 수 있습니다. 잘하는 아이를 보면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대하는 태도 자체가 자신에게 오는 그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경험에서 얻은 ‘좋거나 나쁘거나’의 양극단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사고는 좋은 대학이나 직장 가기도 글렀으니 ‘내 인생은 실패’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무엇을 해봐도 소용없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압박감은 심해지는데 공부에 매달려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에는 더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이러한 스트레스로 시험 불안, 공황장애 등의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사랑과 인정을 줍니다. 조건에 따라 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성적이 올랐으니 이번에는 인정을 해주마

공부도 못 하는 너를 나는 좋아할 수가 없어

다른 집 아이들처럼 제대로 해야 나는 너를 사랑해 줄 거야


이것은 부당한 처사이며, 존재 자체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상대에게는 그렇게 경험됩니다.     


사실 외모, 성격, 성적 등의 요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존재와 내적 경험(감각충동감정욕구 등)에 대한 부정(No)에서 기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중받지 못한 결과가 이렇게 참혹한 것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타자로부터 수용받고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신뢰하게 됩니다. 우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고 너는 맨날 울기만 하냐고, 뭘 잘해서 우느냐고, 어서 빨리 뚝 그치지 못하냐고 혼을 내면 내 감정과 욕구가 수용되는 것을 감각할 수 없지요. 물 쏟아서 혼나고, 신발주머니 잃어버려서 혼나고, 자꾸 넘어져서 혼이 나던, 지금도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제 얘기입니다(눈물샘을 틀어막는 수술은 없나요...).


그래서 상담 장면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내담자를 수용하고 존중하려 합니다. 이 마음이 최소한이라도 전달되기 위해 조건 없이 그를 ‘긍정(Yes)’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담자가 표현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다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말이나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담자의 행동 이면에 담긴 의도와 감정, 생각, 욕구 등을 끄집어내어 읽어주는 것이며 그것이 내담자가 소중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는 존재와 내적 경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담자도 자신을 수용하는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내담자가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기를 기대하며,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느꼈구나’하고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으며 만나봅니다.      

자기혐오의 무게를 조금씩 감(減)하도록 그 자리에 있으려 합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어렵고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무능한 상담자라니,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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