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천년이상을 지탱해 온 서양 철학사에 정면 도전한다.
그들은 고정된 개념과 원칙에서 탈주를 꿈꾼다.
그들은 신의 영토를 탈출해 개별적 인간의 사유지를 배회한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명사는 고정됨을, 동사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생성의 특성을 갖는다.
‘나는 누구’라는 명사는 ‘누구’라는 프레임에 나를 가둔다.
‘나는 무엇’이라는 명사는 나의 껍데기를 겹겹이 쌓아 나의 영토를 공고히 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곧 다른 동작의 주체로 이동할 수 있다.
동사형 정체성은 매 순간순간의 주체이기에 고정됨이 없이 무수히 이동한다.
아내와 있을 때면 남편이고, 아이들과 있을 때면 아빠가 된다.
학생을 가르칠 땐 선생님이지만, 누군가의 강의를 듣는다면 학생이다.
책을 읽으면 독자지만, 글을 쓸 때는 작가이다.
그는 자유자재한다.
이러한 무한한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는 모든 것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는 수직선 상의 0이다.
어느 쪽으로든 이동이 가능한 무한한 잠재적 에너지장에 존재한다.
그는 늘 동작과 동작의 경계에 서 있는 유목민이다.
이 세상을 고정되고 딱딱한 실체의 세계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매 순간, 매 장소마다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외재화 되어가는 가능성의 유동체이다.
만들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는 블록의 세계가 아니라 뭐든지 빚을 수 있는 찰흙의 세계다.
명사적 삶은 적분의 세계를 살고, 동사적 삶은 미분의 세계를 산다.
적분적 삶은 쌓아 가지만 미분적 삶은 분해하고 분해하여 제로로 향한다.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순간의 값으로만 존재한다.
적분의 삶은 그 무게에 짓눌려 자유를 잃지만, 미분의 삶은 자유로운 날개를 얻는다.
조금 전의 나와 조금 후의 나는 전혀 다른 나일 수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를 ‘무엇이라고’, ‘무엇이었다고’ 완고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이제 곧 생성될 그 무엇이고, 그렇기에 그 어느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나다.
명사적 삶에서 고체는 고체이고, 액체는 액체이고, 기체는 기체다.
그러나 동사적 삶에서 그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것인 것 같았는데 곧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비'는 명사다.
어떨 때는 수증기 덩어리로 존재하고, 무거워지면 물로 존재하고, 땅위를 흐르면 시내가 되고, 강이 된다.
순간 순간 변화하는 이것을 어떻게 '비'라는 하나의 정의 속에 가둘 수 있을까.
동사적 삶은 우주를,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 공간이 바로 모든 것의 벡터임을 안다.
텅 비어 보이지만 모든 가능성의 힘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딱 260자로 만든 경이 '반야심경'이다.
그 경을 또 네 글자로 줄이면 '오온개공'이다.
그것도 많아 딱 한자로 줄이면 '공'이다.
빌'공'이다.
그 '공'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빔'이 아니다.
무한한 힘의 근원이다.
명사는 고정된 실체을 일컫는다.
‘직업’은 명사다.
동사는 끊임없는 이동이고 자유다.
‘하다’는 동사다.
‘나는 의사다‘에서 의사는 명사다.
그러나 그가 의사이기에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행위를 하기에 의사다.
이렇게 삶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살아간다면, 나는 유한한 '나'가 아니라 무한한 '나'가된다.
어제 후회스러워던 내가 어제로 머물러 있다면, 그는 명사로 사는 것이다.
어제의 나로 오늘의 나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오늘 작은 나의 행위가 어제의 나를 지워 버릴 것이다.
오늘의 참담함이 내일로 이어질거라 생각한다면, 그는 명사로 사는 것이다.
오늘의 비참한 나를 내일의 나로 정의하기 때무인다.
내일있을 작은 나의 행위가 오늘의 나를 지워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얽어매는 명사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매 순간 모든 행위 자체가 ’나‘인 동사의 삶으로 끊임없이 이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