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
암흑 속에서 눈을 뜨면, 서서히 암흑에 적응하게 된다.
처음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게 캄캄했던 암흑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 적응을 하게 된다면 무엇이든, 어떻게든 그 존재를 드러낸다.
환한 빛 아래였다면 모든 것이 명확했으리라. 그러나 그 명확함 때문에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다른 존재들도 명확하게 보이는 만큼 나의 존재도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빛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래서 빛 속에서는 모두 얼굴이라는, 드러냄의 속임수를 쓴다. 드러내는 얼굴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형되는지 모르며 빛의 시공간만이 영원한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암흑은 반드시 온다.
암흑이 오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던 세상을 잃은 이들은 자신의 얼굴도 잃는다. 그렇게 암흑 속에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만이 있던 세계도 함께 사라진다. 암흑이 오면 그렇게 세상을 한번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 암흑 속에 빠져 있다 보면, 느껴진다. 얼굴이 아닌 몸이. 사실은 얼굴보다 더 커다란 몸이 존재를 드러낸다. 밖으로 드러냄이 아니라 물성의 맞닿음으로써 다른 이들이 여전히 있음이 느껴진다. 맞닿음은 생김새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닿아 있는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 존재함 자체로 충분한 세상, 암흑은 존재의 시공간이다.
그리고 다시 빛이 온다. 암흑을 경험한 이는 이제 얼굴과 몸을 모두 가지고 살아간다. 그의 빛 아래에서도 그림자라는 암흑을 달고 살아간다. 그의 그림자는 그가 지금 딛고 있는 땅에 그 존재의 뿌리다. 그의 암흑에는 빛이 남기고 간 달이 뜬다. 달은 그의 존재가 드러나는 창문이다. 그렇게 그의 암흑과 빛 또한 맞닿게 되어 그의 온전한 하루를 만들어낸다.
글쓰기 모임에서 주제어 '암흑'을 골라 쓰게 된 글이다. 요즘 철학수업에서 읽어가고 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잠에 대한 현인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깨어 있어야 하고, 낮에 열 번 자기를 극복해야 하며, 낮에 열 번 자기와 화해해야 하며, 낮에 열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낮에 열 번 웃고 쾌활해야 한다. 그래야 숙면에 이를 수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진정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나를 극복은커녕 거의 맨날 지는 거 같고, 그렇게 진 나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스스로한테 지느라 바빠 진리를 찾을 수도 없어 얻어걸리는 진리만을 스쳐 지나가는 거 같았다. 그러나 어떤 희망이 있는 것 같이 열 번은 웃고 쾌활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잠에 들 수 있는 건가?
잠, 밤, 암흑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이 일 년에 몇 번이나 될까? 이것들이 세상에 있는 것이든 마음속에 있는 것이든 잠과 밤은 낮으로 바뀌어야 할 것으로, 암흑은 빛으로 쫓아내야 할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낮에 휘둘려 딸려온 두려움을 뒤집어 씌워서 보는 시각이지 않을까? 잠, 밤, 암흑 모두 그 자체로는 그냥 있는 것이고,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꼭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빛과 암흑의 시간, 어느 한쪽만을 살아가지 않고 그 모두를 가진 온전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이디어에 가까운 글이지만 생각이 이어져 간다면 언젠가 더 다듬어질 또 다른 글이 태어났다.
질문들
1. 나에게 필요한 암흑이란?
2. 암흑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3. 암흑을 맞이하기 전, 낮에 두고 오고 싶은 것은?
4. 암흑에 간직하고 싶은 것은?
5. 내가 생각하는 온전한 하루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