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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미 Oct 09. 2022

소설 고라니9

판다

  이번 정기인사 이후로 나는 새로운 팀원들과 일하게 되었다. 모두가 처음 일해 보는 사람들이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모르는 사람들인데다가 스컹크 같은 인간은 없어 보였으니까. 이때 나는 사무실 내에서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여기서 제일 두드러지는 사람은 팀장인 자벌레이다. 아마도 회사 내에서도 최고로 출세지향적인 인물일 것이다. 예전부터 업무는 다른 사람한테 미루고 자신의 입신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다는 얘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단시간에 팀장 자리에 올랐고 아마도 그 뜻은 여기서 멈추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팀장으로 있으면 팀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자명하다. 모두들 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똘똘 뭉쳤다. 그렇지만 나는 분위기를 흐리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 적당히 했다. 그런 흐름에 좌우될 하등의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자벌레는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나를 멀리했다. 그렇게 적당히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판다는 그런 어느 날 찾아왔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자벌레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건조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선배님 안녕하셨어요. 잘 다녀오셨어요?”

  나는 고개를 까딱 하면서 인사했다.

  판다는 나를 보고 살짝 웃어 주고는 다시 자벌레를 향해 말했다.

  “그대로시네요. 저는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하시지요.”

  “어, 어, 그러게. 좋아 보이네. 아, 식사 좋지.”

  “아, 그렇지. 고라니 씨도 괜찮으면 같이 식사해요.”

  판다는 여유로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벌레에게 눌리지 않고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판다의 얼굴 주변으로 환한 후광이 드러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판다가 사무실을 나가자 뭔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자벌레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난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벌레가 연구기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는데 판다가 그 증거를 제시해서 자벌레의 잘못을 밝혀냈고 그로 인해 자벌레는 징계성 인사조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징계도 잠시였고 자벌레가 무슨 수를 썼는지 그 이후로도 진급을 거듭했다. 심지어 자벌레가 이사 자리까지 노리고 있다는 풍문도 들었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자벌레는 판다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판다는 업무 면에서 독보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어서 자벌레가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판다는 지난 3년 동안 해외 지사로 파견 나갔다가 막 복귀한 참이다. 그런 판다가 자벌레에게 대놓고 귀국인사를 하러 온 것은 제우스에게 맞서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가 그의 화려한 귀환을 알리는 장면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실 판다와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판다가 해외 지사로 파견 나가기 전에 잠시 나를 불러냈던 그때 처음 대화를 했다. 그 당시 나는 이곳에 환멸을 느끼고 벗어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지요? 고라니 씨를 보니 내가 한마디 안 할 수 없어서 연락했어요. 나도 여기 들어와서 고라니 씨처럼 힘든 일 많이 겪었거든요. 옛날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한번쯤은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나는 다음 주에 출국해요. 거기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 마음껏 할 거예요. 여기하고는 환경이 다르니까 힘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후에 여기로 다시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시 고라니 씨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라니 씨도 힘내요.”

  판다는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그 말이 내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꼈고 그 동질감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판다가 부러웠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인정도 받고 성취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여기서 요 모양 요 꼴이구나 하는 열등감도 느꼈다.

  그런 판다가 3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해외 지사에서도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떠들썩하게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한편 스컹크 무리들이 판다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다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스컹크가 감히 건들지도 못하는 대상이라니!     


  나는 자벌레 맞은편에 판다와 나란히 앉았다. 고급 요릿집의 단독 룸에 마련된 자리였다. 내게는 편하지 않은 자리임에도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나는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연이어 나오는 음식들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용이 꽤 나올 텐데도 판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사 내내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자벌레는 어쩔 수 없이 대화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였다. 둘 사이에서 주도권은 판다가 쥐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판다는 자벌레 앞에서 항상 당당하기 때문에 그런 자리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했다. 자벌레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인간한테 돈 쓰는 건 아깝지만 한 번 정도는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도 했다. 판다는 오히려 그런 자리에 나를 끌어들여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같이 식사하게 돼서 즐거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이후 판다와는 가끔씩 산책을 같이 하곤 했다. 업무에 지친 뇌를 쉬게 해 주기 위해서 일부러 걷는 것이었다. 산책 코스는 때로는 화사한 봄꽃이 만개하기도 했고 때로는 짙푸른 녹음이기도 했고 때로는 곱게 물든 풍경이기도 했다. 걸으면서 회사 일이나 업무 이야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었다.

  판다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지방에서 살았다고 했다. 판다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운영하던 사업체의 도산으로 경제상황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유복한 환경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판다는 공부도 잘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금융권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지금 회사의 입사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입사 후에 고졸이라는 이유로 근거 없는 차별을 많이 받았던 듯했다. 거기에는 스컹크 일당의 방해공작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다는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고 결국에는 해외지사 파견 자리까지 따냈던 것이다. 주변의 시기와 질투가 더욱 심해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판다는 그런 일들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판다에게 감동받았다. 나도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판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판다처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사 앞에서 내 의견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는 나처럼 피해를 입는 사람이 앞으로는 없기를 바랐다. 공벌레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것도 있고 해서 나는 후배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선입견을 갖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경험으로만 판단하자. 그렇게 내가 변하면 내 주위도 따라서 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절감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발단은 10년 후배인 시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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