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만 원의 양심거울
어두운 지하주차장 구석에 알록달록한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은행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 안에는 이름이 적힌 통장 한 권, 그리고 그 사이로 두툼한 현금이 끼워져 있었다. 만 원권 열 장, 오만 원권 열두 장. 모두 합쳐 칠십만 원.
만약 ‘누군가’가 이 돈을 주웠다면,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그날은 일정이 빡빡했다. 은행, 친정, 식당, 미용실, 편의점, 어린이집. 그래도 하루에 모든 일을 끝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봉투가 사라졌다.
명절을 앞두고 은행에 들렀다. 조카들 세뱃돈, 부모님 용돈, 명절 뒤 결혼식 축의금까지 준비하려 했다. 신권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창구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신권이 안 들어왔어요.”
결국, 현금인출기에서 일일 한도인 칠십만 원을 뽑았다. ‘조금 모자라겠지만, 집에 있는 현금이랑 합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차에 타려던 순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언제 도착해?”
엄마는 약속에 늦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응, 가고 있어. 오 분이면 도착해.”
급히 봉투를 조수석에 던지고, 그 위에 가방과 점퍼를 포개둔 뒤, 차를 몰았다.
친정집 마당에 도착하니 엄마가 이미 나와 있었다.
“트렁크 좀 열어봐. 김치랑 반찬 실어야지. 배도 좀 챙겼어.”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조수석 짐을 뒷좌석으로 던졌다.
“전화하면 나오라니까, 왜 매번 나와 있어. 더운데.”
“넌 밥 먹고 바로 간다며? 숙모가 점심 산대. 빨리 가자.”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각자의 말들이 엉켜 흘렀다.
외숙모는 결혼식을 앞둔 아들 이야기를 하며 우리에게 점심을 사주셨다. 배를 채우고 나오는 길, 외숙모가 “잠깐 기다려 봐.” 하며 차로 달려가 조미김 두 상자와 반찬 그릇을 꺼내 건넸다. “이거 고객들 나눠주려고 실어둔 건데 남았어.” 그러곤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며 “지갑에 이거밖에 없네. 애들 줘.” 하셨다.
외숙모의 손끝에는 늘 정이 묻어 있었다. ‘안 되겠다. 축의금 십만 원에서 하려했는데, 이십만 원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차에 탔다.
미용실로 향했다. 초췌한 몰골로 시댁을 가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다듬고 손질이 간편한 파마를 했다. 무려 세 시간 반이 걸렸다. 예상보다 늦었고, 둘째 픽업 시간이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파트 후문 편의점에서 미리 주문한 물건을 받아 트렁크에 넣고, 단지 내 어린이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엄마, 왜 늦게 왔어?” 둘째가 하원 시간에 늦었다며 투정을 부렸다. 보조석에 둘째를 태우고 지하주차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지하주차장은 이상하리만큼 한산했다. 한 손엔 편의점 봉투, 다른 어깨엔 아이 가방, 백팩 한쪽 끈에는 점퍼를 끼워 넣었다. ‘남은 짐은 짐수레로 한 번에 옮겨야겠다.’ 생각하는데 둘째가 트렁크를 살피더니 “엄마, 내가 배 하나 들고 갈래.” 하며 배를 집어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굴러가는 배를 쫓으며 둘 다 깔깔 웃었다. 한쪽이 터진 배와 둘째의 손까지 잡고 집으로 향했다.
그 평화로운 장면이, 하루 뒤 내 머릿속을 뒤흔들 줄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현금 찾아왔으니까 당신이 안 찾아도 돼요. 하루 한도 칠십만 원이라서 그것만 뽑았어요. 신권은 아직 없대요.”
그리고 백팩을 열었다. 그런데 돈 봉투가, 없었다.
“어? 돈 봉투 없는데?” 순간 머리가 멍해졌지만 차에 있겠지 싶었다.
“아, 콘솔박스에 뒀나 보다. 이따 큰애 데리러 가면서 꺼내올게요.”
큰아이 픽업 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왔다. 차에 타 제일 먼저 콘솔박스를 열었다. 그러나, 없었다. 돈 봉투가 사라졌다. 의자 틈, 바닥, 트렁크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뛰는 건지 멈춘 건지 구분이 안 됐다.
큰딸 픽업엔 늦을 수 없었다. 일단 차를 몰았다. 정문으로 빠져나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제 차를 세웠던 후문 앞 편의점에 들렀다가,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 차가 서 있던 자리에는 다른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바닥을 살펴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큰딸을 데리러 가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야? 네 차가 정문, 후문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는 알람이 계속 울려.”
해결될 때까지 남편에게 비밀로 하려 했는데, 휴대전화로 입출차 알람이 갔나 보다.
“여보, 나 차에도 돈 봉투가 없어요. 몇 군데 찾아보다가 일단 큰애 데리러 가고 있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 좀 해볼게요.”
큰딸이 뮤지컬 수업을 받는 동안, 학교 앞 커피숍에서 어제의 내 경로를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봉투째 옆자리에 뒀고, 그때 백팩과 점퍼까지 옆자리에 뒀다. 엄마를 태우며 짐을 뒷좌석으로 옮겼다. 마당에서 흘렸다면 엄마가 발견했을 텐데 아무 말 없는 걸 보니 거긴 아닌 것 같다. 식당에 가서는 차 키만 들고 내렸고, 혹시 김상자 넣으면서 흘렸을까 싶었지만 그곳은 손님이 많은 야외 주차장이니 떨어뜨렸다면 찾을 수 없을 듯 했다. 미용실에는 백팩을 메고 들어갔고, 가방은 빈 의자에 뒀는데, 옆자리에는 고등학생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혹시? 아, 아니다. 가방에 돈 봉투를 넣지 않았다. 편의점 주차장? 어린이집 주차장? 둘 다 가능성이 크다. 편의점 들어가기 전에 장바구니를 찾느라 차 안을 살폈고, 둘째를 태우면서 조수석 짐을 옮기기도 했다. 지하주차장에서는 둘째와 짐까지 챙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 아, 배 굴러갈 때 차가 한 대 들어왔는데 혹시….
나는 점점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잃어버린 건 돈인데, 잃어버린 것 같던 건 나 자신이었다. 한 시간 넘게 기억을 되짚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든 장소마다 우연히 봉투를 떨어뜨렸을 소지가 다분했다. 차량 블랙박스엔 뭔가 찍혔을까 싶었지만, 저장 기간이 짧았다. 복원 업체가 있다지만, 복원된들 단서가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주차장마다 CCTV는 협조를 구하면 볼 수 있을 테지만, 그 안에 뭔가가 찍혔을까.
내가 봉투를 떨어뜨린 게 맞다면, 그다음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아파트 주차장, 식당, 미용실 주차장 중 어딘가에서 누군가 그 봉투를 주웠다면? 봉투를 열면 은행 통장이 있고, 그 겉면에는 이름이 정직하게 쓰여 있다. 근처 지점에 가져다주면 연락이 올 것이다. 아파트에서 주웠다면 관리사무소로 전달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편이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두고 자리를 비워도 그대로 있는 나라. 그런데 문제는 현금이었다. 통장만 있었다면 그냥 기다렸을 텐데, 칠십만 원이 함께 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라면 어땠을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보통’이라는 말이 이렇게 광범위하고 어렵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보통의 착한 사람, 보통의 나쁜 사람, 아이, 청소년, 노인…. ‘나’도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고, ‘다른 누군가’의 행동은 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접수된 건은 없었고, 발견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직원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잃어버렸다고 말해야 했다. 연락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례금은 얼마를 드리는 게 될까. 나라면 받을까, 거절할까. 만약 CCTV로 주운 사람을 찾았다면? 그냥 돌려받을까, 아니면 신고할까. 그 후에 나는 편히 살 수 있을까.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까.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외출 중이었다.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멍한 시선 끝에 식탁 위에 잔뜩 쌓아둔 책이 보였다. 그런데 그사이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어? 이거 내가 어제 가방에 넣었던 책인데? 언제 꺼냈지?’
책과 노트 사이에서 무언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설마….”
돈 봉투였다. 가방에 넣은 기억도 없는데, 책 사이에 비스듬히 끼워져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돈 봉투 찾았어. 가방에 넣었던 책 사이에 있었어. 나도 모르게 넣었던가 봐.”
얼떨떨했다. 관리사무소에도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직원은 나보다 더 기뻐했다.
돈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잃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나를 탓했고, 누군가를 의심했고, ‘누군가’를 미워했다. 사건은 해결됐지만, 생각은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만약 내가 그 돈을 주웠다면 어땠을까. 잠시 고민은 했을까, 아니면 그냥 챙겼을까.’
사람은 종종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스스로 증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진짜 양심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드러나고, 진짜 품격은 아무도 칭찬하지 않을 때 빛난다. 나는 그날, 내 안의 작고 흔들리는 마음을 봤다. 돈을 잃어버린 일도, 찾은 일도 결국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살다 보면 또 칠십만 원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돈일 수도, 말 한마디일 수도, 그 무엇이든 형태를 바꿔 나를 시험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결국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를 만들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걸 알게 됐다. 요즘은 조용히 바라고 있다. 부디, 당분간은 내가 흔들리지 않게 내 앞에 눈먼 돈이 나타나지 않기를.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진짜 양심 있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다음에 읽을 책은, 어떤 문장으로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어줄지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