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6층, 그녀는 18층에 살았다.
그녀는 홀로 고군분투하며 육아하던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고,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동갑인 우리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금세 가까워졌다. 참 정 많은 사람이었다. 지극히 외향적인 그녀는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연까지 다 꿰고 있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알게 된 사람의 대부분은 그녀를 통해 알게 된 이들이다.
한 달에 한 번 아파트 공터에 간이 장터가 열렸다. 계획적이고 신중한 나는 그저 물건들을 눈으로 훑으며 지나치기 일쑤였지만, 그녀는 달랐다. 가판대의 내복, 아이들 장난감, 오렌지, 딸기… 어느 곳 하나 쉽사리 지나치지 않았다. 사장님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거침없이 물건을 결제했다.
오렌지를 한 박스 사서 다음 가판 사장님에게 몇 개 나눠주고, 그 가게에서 내복을 사면서 손수건을 얻었다. 다시 옆 딸기 가판에서는 오렌지를 나눠주고 딸기를 덤으로 얻었다.
나는 매번 놀라곤 했다.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나에게, 그녀의 삶은 마치 다른 시대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웃과 자연스럽게 나누며 사는 그 방식은 신기하고도 낯설었다.
몇 번의 ‘주고받기’가 끝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야? 뭘 사고 있는 거야? 무슨 과일을 십만 원어치를 사?”
남편의 카드로 시원하던 결제하던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애가 셋이야. 그리고 나도 입 있거든? 나는 안 먹어? 다 우리가 먹으려고 산 거니까 그만 전화 끊어.”
하지만 이 말에는 묘한 모순이 있었다. 그 집 아이 셋은 모두 입이 짧았다. 과일은 늘 한입만 맛보고 끝이었다.
한바탕 장을 보고 온 그녀의 손에는 과일 몇 가지, 아이들 내복, 그녀를 위한 외출복 몇 벌, 그리고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를 학용품과 장난감까지 들려 있었다. 결제한 품목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들이 제법 많았다. 그 물건들은 가족에게 맞지 않을 경우 또 한 번 ‘나눔’의 기회를 가졌다. 나에게도 제법 많은 식료품과 장난감이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가끔은 그녀가 눈썰미로 골라온 옷이 본인에게 맞지 않을 때, 그보다 작은 체구의 나에게 자연스레 넘어왔다. 내 취향이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내 몸에는 잘 맞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서 받은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글을 쓰고 있다. 그녀가 생각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진짜 의도한 게 아니라서, 이 우연이 너무 소름끼칠 정도로 놀랍다.)
그녀는 큰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큰아이가 돌이 되자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첫 등원 날은 적응 기간이라며 엄마들도 함께 어린이집에서 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자아이 둘, 남자아이 하나. 세 아이는 모두 1, 2월생이라 생일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했다. 처음으로 제법 오랜 시간,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와 다른 엄마들을 바라본 시간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로 이사 와 조동(조리원 동기)조차 없던 나는, 또래 엄마들을 마주한 그 상황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다행히 다른 두 명의 엄마는 무척 외향적인 사람들이라서,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느새 연락처를 주고받고 있었다.
집 밖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동네에 아는 사람들도 하나둘 늘어갔다. 혼자 책으로 육아를 배우며 고군분투하던 나에게도 드디어 육아 동지가, 이웃사촌이 생긴 것이다.
나와 동갑인 엄마 하나, 나보다 한 살 어린 엄마 하나. 같은 아파트에 살고, 동갑내기 아이를 키우고, 또 제법 “나이가 있다”라는 공통점 덕분인지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아이들 등 하원 시간을 맞춰 함께 움직였고, 한 달에 한 번은 엄마들끼리 낮술 모임도 했다. 세 아이는 누구 하나 빠르거나 모자람 없이 거의 같은 속도로 성장했다. 부러워할 것도, 뒤처질까 걱정할 것도 없는, 편안한 육아였다.
잠깐의 일탈이던 낮술 모임은 내가 둘째를 갖고, 이어 다른 엄마가, 또 이어 다음 엄마까지 차례로 임신하면서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대신 다 함께 태교 모임을 이어 갔다.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강좌를 듣고, 영화를 보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제법 건전한 만남이 이어졌다.
둘째 아이들이 태어나자 또 다 함께 큰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입소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함께 육아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살 어린 엄마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세 명이 규칙적으로 만나던 모임은 그때부터 모양이 조금씩 달라졌다.
남은 두 사람, 나와 18층 여자는 빠진 자리를 채우듯 더 자주 왕래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집이지? 귤 좀 가져다줄게.”
“○○엄마, 자석칠판 없지? 내가 문 앞에 두고 갈게.”
전화를 끊고 나면 그녀는 1분 만에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도 필요 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가끔, 아니 사실은 꽤 자주 그 물건들은 내게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또래를 둘씩 키우다 보니 함께 보내는 시간은 자연스레 길어졌다. 긴 대화의 시작은 늘 아이 이야기였다. 어제는 큰애가 어쩌고, 오늘은 둘째가 어쩌고….
아이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금방 끝나고, 곧 주변 이야기로 넓어졌다. 남편 이야기, 시댁 이야기, 친구 이야기, 아는 사람 이야기….
돌이켜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함께하는 시간이 어쩐지 조금씩 버겁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