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옹지마 Sep 05. 2022

등기우편으로 배달된 1999년 -2-

※ 2편입니다. 1편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3편은 더 재미있을 예정입니다.


1편 보기


‘야구에 관심 있는 학생 누구나 목요일 낮 12시 사회체육교육학과 강의실 109호로 오세요.’      


무역영어 수업을 마치고 긴장감과 설렘 이 두 가지 감정을 마음에 품고 중앙도서관을 지나 사회체육교육학과 건물로 향했다.     


학교 제일 안쪽에 위치해 있는 사체과 건물은 왠지 모를 낯설음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쪽 건물은 학교를 다니는 지난 몇 년 동안 가본적 없는 곳인 듯했다.     

 

109호 강의실 앞에 도착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11시 50분이었다.      


‘늦지 않았군.’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강의실 문을 한 뼘 정도 빼꼼히 열어 안을 확인했다.      


강의실 안에는 열 명 정도의 학생들이 서먹서먹하게 앉아 있었다.    

  

‘여기가 맞나 보군.’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창가 쪽 빈자리에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앉았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정도로 숫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휴대폰을 꺼내 테트리스 게임을 했다.     


그러나  문이 열릴 때마다 내 시선은 문으로 향했다. 


12시가 다 될 때까지 열 명의 학생이 더 자리를 채워 강의실 안에는 총 열아홉 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 여학생도 두 명이나 있었다.     


이 여학생은 훗날 야구 동아리에서 매니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열아홉 명이라...


야구는 아홉 명이 하는 운동이니 살짝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인 야구를 해본 경험으로 빗대어 보면 동호인 수준의 야구는 경기를 뛰지 못하는 선수가 있으면 꼭 불화가 생기기 때문에 걱정이 살짝 들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 강의실 문이 열리고 19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에 눈대중으로 봐도 120kg는 넘어 보이는 거구 한 명이 들어왔다.      


자신을 사회체육교육학과 조교라고 소개했다. 학번은 94이며, 이름은 윤광수라고 했다.    

 

광수형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광수형은 먼저 야구동아리를 창단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우리 학교는 지역 연고인 프로 야구단과 협약을 맺게 되었는데 협약 내용 중에 이 프로 야구단은 야구동아리 창단을 위해 각종 야구 용품들을 지원하고 프로 선수들이 직접 레슨까지 해준다 내용이었다.      


그리고 실제 프로선수단이 시합하는 야구장에서 연습도 지원한다고 했다. 


사회인 야구인으로서 꿈같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야구 동아리는 학교 서포터스로 활동하면서 학교 측의 지원도 받게 된다고도 했다.     

 

현재 내가 뛰고 있는 사회인 야구팀과 비교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야구 환경이었다.


설명회 겸 첫 모임이 있은 후 돌아오는 토요일 12시에 첫 연습경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첫 연습부터 사회인 야구팀에서 야구를 했던 경험으로 광수형과 함께 대부분이 초보자인 회원들에게 공을 잡는 법, 글러브 사용법 등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쳐야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감독직을 맡게 됐고, 광수형은 구단주 겸 코치직을 담당하기로 했다.      


처음 만나는 형이었지만 야구를 너무도 좋아해서 그랬는지 우리는 오랫동안 지내온 사이처럼 생각과 마음이 정말 잘 맞았다.      


연습이 없는 평일에도 야구 동아리 운영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자주 만났으며, 야구 이야기를 넘어 개인적인 일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야구 동아리의 실력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광수형과의 관계도 더욱 끈끈해졌다.   

 

프로야구 경기도 함께 관람하고, 광수형의 집에도 놀러 가는 사이가 됐다.     


광수형은 대전에서 가장 평수가 넓고 비싼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대전에서 하나밖에 없는 차도 갖고 있었다.      


광수형은 당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부자였다.   

   

형은 동생과 어머니 이렇게 셋이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남은 가족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많은 재산을 남기고 먼저 돌아가셨다고 했다.     


우리는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서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연락하며 우정을 계속 이어갔다. 


그 사이 우리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물론, 서로의 결혼식과 아이의 돌잔치에 참석해 서로를 축하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조교 생활을 마친 광수형은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새아버지의 회사에서  취직해 일을 시작했다.      


전기공사를 제법 크게 하는 회사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환경도 많이 바뀌고 있었다.    

 

오전 10시 정도가 됐을까 광수형의 전화가 왔다.   

   

“상태야. 오늘 점심 약속 없으면 나랑 같이 할까?”     


“좋지. 형, 여기 양평해장국 엄청 맛있게 하는 데가 있어. 거기서 먹자. 내가 쏠게.”     


<3부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등기우편으로 배달된 1999년-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