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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zi Jan 08. 2024

유서

적당히 서로 부대끼며 살다 천천히 잊어주세요.


글쓰기 프로그램 중에 새해맞이 기념으로 유서쓰기를 진행했습니다.


유서.


세상이 내게 별로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마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슬픈 마음을 타고 떠납니다. 저는 친절하고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고 싶었지만 외로움은 제 일평생을 따라다녔네요. 주변에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분명 많았지만 제 욕심에 겨워 거기에 깔려 죽습니다. 한명 한명의 따뜻함을 넘어, 세상의 따뜻함이 필요했어요. 그러나 세상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런저런 변명이 듣기 싫어 귀를 막고 등을 돌릴 가장 빠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저를 해하세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바고, 그걸로 지금, 이 대화가 끝날 수 있다면 그냥 해하세요. 그게 우리가 서로 등 돌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면. 이 순간을 끝낼 수 있는 가장 명쾌한 결론이라면.


세상은 언제든 저를, 저의 어떤 것이든 훔쳐 가려고 호시탐탐 침을 흘렸으니 저는 그 모든 것을 순순히 내어 드립니다. 제게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가치는 세상으로 보냅니다. 제 몸과 정신까지도 모두 쓰고 싶은 사람이 가져가셔요. 처분의 결정권은 'OOO'에게 맡깁니다. 'OOO'는 분명 제가 마지막 순간에 고민하고 감각했을 것들을 짐작하고 현명한 선택을 내려주리라 믿습니다. 물론 이 순간에 떠오르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을 지정하여 특별한 무언가를 남기지는 않으렵니다. 특별한 전언도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등을 돌린 사람이 남긴 것을 품어봤자 미련입니다. 오히려 실패의 증거들을 가져봤자 재수가 없습니다. 그저 궁금해하시면 됩니다. 제 슬픔과 미련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듬고, 짐작하고, 상상해 주세요. 영원히 열지 못할 문이더라도 끝없이 두들겨주세요.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 제가 생각보다 덜어내는 데 익숙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딱히 미련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무더기로 쌓인 삶의 흔적들에, 세상에 대한 제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있더이다. 구석구석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미련들이 주렁주렁 딸려 나왔습니다. 지난 미련들을 구경하는 일은 꽤 즐겁고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어요. 역시 망각은 축복입니다. 그러니 저는 휘발되겠습니다.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겠습니다. 실체 없는 연기로 화하겠습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대신, 냄새로 맡고 미세한 잔열로 느껴주세요. 여러분에게 제가 남는 것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굳이 사방팔방 알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르르 모일 필요도 없습니다. 제 장례는 각자의 개인 공간에서 내키시는 대로 자유로이 치러주세요. 장례식의 주인공은 죽은 사람이지만, 결국 주인공 없는 잔치입니다. 남은 자들끼리 두런두런 먼저 간 사람 뒷얘기 하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저는 모든 곳에 있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사라지겠습니다. 제멋대로 일어나는 수많은 장례들을 하나씩 천천히 돌아보며 이승에 대한 미련을 갈무리할게요.


만약 누군가와 제 얘기를 하게 되면 그저 눈을 맞추고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해주세요. 제게 하지 않았던 그 말을 마주한 상대방에게 대신 전해주세요. 그건 이미 세상에 없는 제가 여러분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많은 경우 ‘네게 어떤 것을 원해’라는 말을 대신하여 쓰입니다. 저는 그 말을 ‘내게서 원하는 것을 가져가’로 썼습니다. 제 세상은 그래서 기울어지고 어그러졌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약속을 지켜주신다면, 늦게나마 제 구겨진 세상이 조금씩 펴질 것 같습니다.저는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을줄 알았는데, 열심히 믿었는데,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게 분명 있다는 걸 증명해버렸네요. 저는 먼저 갑니다. 적당히 서로 부대끼며 살다 천천히 잊어주세요. 그래도 당신들 덕에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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